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3. 송천 양응정, 대를 이어 의를 지키다 - 광주 임류정, 양씨 삼강문 |
입력시간 : 2009. 12.17.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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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문장가로 율곡과 '천도책' 문답 회자
말년 고향서 후학 가르치며 충절 가풍 세워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던 해, 한 아이가 능주 도곡면에서 태어났다. 바로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학포 양팽손의 셋째 아들이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양팽손은 세상이 싫어 화순 쌍봉사 근처에 학포당을 짓고 은거를 한다. 한 칸 집을 다 짓자 학포는 벽에다 큰 붓으로 ‘문왕의 아들로서 무왕이 태어났도다. 학포 양팽손의 자식 양응정’이라고 적었다.
송천 양응정 (1519-1582). 아버지에게서 공부를 배운 그는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과 정자에 임명된다. 1555년(명종10년) 5월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구가 70척의 배를 이끌고 달량포(영암의 한 포구)를 침입하여 영암, 장흥, 강진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장흥군수가 전사하고 영암군수가 포로가 되는 등 국방에 구멍이 크게 뚫리었다.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호조판서 이준경을 급파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후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비변사를 설치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1556년 2월 명종 임금은 모든 관리들에게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를 물리칠 대책을 적어 내라고 하였다. 양응정은 이 시험에 장원을 한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는 승진하여 이조좌랑에 오른다. 그런데 그는 기개가 너무 강하여 굽힐 줄 몰랐다. 명종 비 심왕후의 외삼촌 이량에게 밉게 보여 관서, 관북평사로 발령이 난다. 이때부터 그는 외직으로 내몰리는 고난이 시작된다.
양응정은 자신을 “나는 글 쓰는 일에는 자신이 없고 다만 센 활로 오랑캐를 쏘아 마칠 줄을 알 뿐이다”라고 자탄을 한다.
나중에 택당 이식이 오평사영(五評使詠) 시에서 ‘유명한 양공 부자는 산골짜기를 울리고 다니는 호랑이였네. 오색의 붓을 던져 버리고 활을 당겨 서쪽 오랑캐를 쏘려 했네' 라고 양응정을 평한 것도 그가 외직에 머문 것을 안타까워 한 것이었다.
1558년에 양응정은 다시 내직으로 들어간다. 이 때 그는 정사룡과 함께 별시의 고시관이 된다. 양응정은 '천도책(天道策)'을 시험문제로 낸다. 이 문제는 천문이나 바람의 순행과 기상의 이변에 대한 이치를 찾는, 이름 그대로 하늘의 도에 관한 것이었다.
'천도책' 시험문제는 이렇다.
'하늘의 도(天道)란 알기도 어렵고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떠다니며 한번 낮이 되고 한번 밤이 되기도 하는데, 더디기도 하고 빠르기도 한 것은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인가? 간혹 해와 달이 한꺼번에 나와서 때로는 겹쳐 일식과 월식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략)
천지가 만물에 대하여 각각 기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기가 유행하여 흩어져서 만 가지의 변화가 되는 것인가. 만일 올바른 길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천기가 어그러져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일이 잘못된 때문인가.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을 것이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아니하며, 눈과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아니하고 모진 바람과 궂은비가 없이 각각 그 진리에 순응하여 마침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잘 자라나게 할 것인가.'
이 시험문제에 대하여 별시에 응시한 율곡 이이(1536-1584)가 유창하게 답안을 쓴다. 그가 쓴 답안의 요지는 이기합일(理氣合一)과 천인상감(天人相感)이다. 즉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의 기가 바르면 천지의 기도 역시 바르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여야 천지가 평안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천지가 안정되려면 덕 있는 군주가 정치를 잘 하여야 한다고 끝맺는다.
천도책은 명나라에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중국의 사신이 이를 보고 “천하문장의 책제이요, 일대현사의 답안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천하문장이 낸 시험문제이고 일대의 현명한 선비가 쓴 답안이라는 것이다.
절개의 선비, 사암 박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공섭(양응정의 자)의 책제는 일세의 문장이며, 숙헌(이이의 자)의 답안은 실로 궁리의 학문이다. 만약 처지가 뒤바뀌어 공섭이 응시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답은 이와 똑같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1571년에 양응정은 또 한번 시련을 겪는다. 경주부윤으로 근무하다가 파직된다. 양응정은 낙향하여 능주에서 나주 박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임류정(臨流亭)을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이때 양응정은 고봉 기대승(1527-1572)과도 자주 어울렸다. 고봉이 지은 임류정 시가 이를 말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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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끝에 맑은 달 유유히 떠오르니
술을 잡고 물에 임해 모든 걱정 흩트리노라.
인간 세상에 몇 번이나 영화와 근심을 보았던가.
술 취한 중에도 부평 같은 인생임을 알겠네.
1576년에 양응정은 미암 유희춘의 신원으로 의주목사가 된다. 그러나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 때 영광군수 고죽 최경창(1539-1583)이 그를 찾아온다. 송천이 최경창에게 보낸 시를 읽어 보자.
최고죽에게 보냄
삼년이나 못 본 것이 서로의 한이더니
향기로운 술병 메고 정 못 겨워 찾아왔네.
온갖 꽃 피었다가 지고 난 뒤에
강변에 비 맞은 풀은 푸르기만 하여라.
고죽은 송천의 제자로서 서울에서도 잘 어울렸다. 송천이 지은 시중에 ‘여종 소합의 죽음을 슬퍼하는 만시’가 있다.
늘 하서공의 칠석부를 외우더니
칠월칠석날에 돌아가고 말았구나.
맑은 마음에 재주 있는 너를
어디 간들 다시 생각나지 않으랴
이 시에 송천은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아 놓았다.
그녀는 가사로 서울에서도 이름났으며, 칠석부(七夕賦)를 잘 외웠다. 고죽 최경창이 그녀를 극진히 아껴주었는데 나이 열일곱에 칠월칠석날 죽었다.
여기서 칠석부는 하서 김인후(1510-1560)가 그의 나이 19세 때 성균관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장원한 시이다. 견우와 직녀의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한 55구에 이르는 장편 노래이다. 송천은 하서를 극진히 모시었다. 허균의 '성옹지소록'에 그 글이 나온다.
양응정은 기상이 일세에 떨쳤으나, 김인후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굴복하여 공경스럽게 받들었다. 물러간 뒤에는 반드시 여러 날 동안을 탄복하며 “후지(厚之 김인후의 자)는 오늘날의 안자(顔子)로다” 하였다.
고죽 최경창은 손곡 이달, 옥봉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기생 홍랑과 지독한 사랑을 한 풍류객이다.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의 홍랑 시조는 고등학교 국어 책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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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 소합은 양응정과 최경창이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자주 칠석부를 읊었나 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녀는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칠월칠석날 죽은 것이다.
송천은 문장에 능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선조 시절에 팔문장가로 알려졌으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호남의 대문장가 10걸 중 한사람이었다.
1577년에 양응정은 성절사로 명나라에 간 이후 다시 대사성 벼슬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아예 은퇴한다. 이후 그는 인재 양성에 전념한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정철, 박광전, 최경회, 최경창, 백광훈등이 있다. 그는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병법도 가르쳤다.
한번은 군사훈련도를 가르치면서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기 짝이 없는데 나라를 지키는 자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고, 문무의 관리들은 맡은 일을 게을리 하고 세월만 보내며 환난에서 벗어날 대책은 마련하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다. 남쪽의 근심이 멀지 않는데 나야 그 환난을 보지 않을 것이나 너희들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배운 것을 게을리 하지 말고 잘 대비하라” 하였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마을입구에는 임류정과 양씨 삼강문이 있다. 임류정에는 김인후, 기대승, 고경명등과 교류하면서 주고받은 시가 걸려 있다. 양씨 삼강문에는 충신, 효자, 절부의 흔적이 있다.
양응정의 아들 양산숙은 1593년 6월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한 충신이요, 양응정의 부인과 아들, 며느리들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효자, 절부이었다.
양팽손, 양응정, 양산숙. 이들은 대를 이어 의를 지킨 사람들이다. 호남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김세곤 (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호남과 영남의 사림들이 함께 만나다 - 나주 경현서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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