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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4회 -나주 경현서원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4.호남과 영남의 사림들이 함께 만나다 - 나주 경현서원
입력시간 : 2009. 12.24. 00:00


경현서원 내 경현사
義를 쫓는 선비의 길에 영·호남은 없었다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기대승·김성일 모셔

지역 달라도 서로 스승과 제자…영남사람이 나주에 건립

퀴즈를 하나 내자. 서울 문묘에 배향된 동방 오현이 모셔진 서원, 이황과 기대승의 신위가 같이 있는 서원, 영남의 유학자 학봉 김성일이 세운 서원이 전라도에 있다. 어느 서원인가?

답은 나주에 있는 경현서원이다. 경현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큰 선비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기대승, 김성일 등 일곱 분을 모신 서원이다. 이중에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은 문묘에 배향된 동방5현이다. 서원의 주소는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이다.

동신대학교 정문에서 오른편으로 831번 국도를 따라 노안면 쪽으로 가면 예비군 훈련장이 나온다. 여기를 지나면 석재 공장이 여러 개 있다. 여기에서 하차하여 자세히 보면 ‘경현서원 입구’라는 표시돌이 있다. 이 석재공장을 감싸고 돌아 3-400m를 가면 왼편에 집이 하나 있고 오른 편에 집이 두어 채 있는데 왼편 기와집이 바로 경현서원이다.

경현서원을 간다. 경현서원은 1583년(선조 16년)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김성일이 지은 서원이다. 그는 1584년 봄에 대곡서원을 세우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모시었다. 당시 서원의 위치는 나주의 서문 밖에서 5 리 떨어진 대곡동(현재의 경현동)근처 이었다. 이 때 김성일은 율시(律詩) 한 수를 지었다.



누가 알았으리요. 선비들이 공부하는 서당이

심상하게 나주 성곽 시가지 근처에 있을 줄을.

誰知俊造藏修地

只在尋常城市間



그런데 김성일은 1586년 12월에 나주목사에서 해임된다. 사직단의 재실이 불이 나서 전부 타 버리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나주 경현서원


1597년 정유재란 때 서원이 소실된다. 그리고 1608년(광해군 원년)에 중건되어 경현 (景賢)이란 액호를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경현이란 사액을 받은 것은 한훤당 김굉필을 주벽으로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굉필을 모신 순천 옥천서원의 강당 이름도 경현당이다.

이어서 1693년에는 기대승, 김성일을 추배하여 모두 일곱 분을 모시게 되었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경현서원도 1871년에 훼철되기에 이른다. 현재의 서원 건물은 1977년에 이곳 영안마을로 이전하여 복원된 것이다.

서원 입구에 도착하니 안내판이 없다. 그래서 이곳이 경현서원이 맞는지 의아심이 들었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어 서원으로 들어가서 강당에 걸린 현판을 보고 경현서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서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 동재와 서재도 없고, 앞마당에 묘정비와 강당 신축 관련 비 두 개만 달랑 있다. 왠지 씁쓸하다. 조선 최고의 유학자를 배향한 서원이 이렇게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다니.

김굉필 후손의 안내를 받아 강당 뒤에 있는 사당을 구경하였다. 사당 이름은 경현사이다. 문을 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일곱 분의 위패가 나란히 있다. 맨 왼쪽에 김굉필의 위패가 있고, 그 다음이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기대승, 김성일 순으로 모시어져 있다.

조선의 대 선비들에게 재배를 올리었다. 그리고 이 분들의 코드를 찾아본다. 첫 번째 코드는 4대 사화의 희생이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희생당한 김굉필과 정여창, 기묘사화의 희생양 조광조, 그리고 1547년 정미사화로 유배지에서 죽은 이언적이 그들이다.

김굉필(1454~1504)은 호가 한훤당이다.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운 것을 계기로 평생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를 간 후 순천으로 이배되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순천에서 참수 당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생인 정여창(1450-1504)도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하여 유배를 간 후 함경도 종성 유배 중에 죽었는데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한다. 그의 호는 일두(一蠹)인데 ‘천지간의 한 마리 좀 벌레’라는 뜻으로 그는 스스로를 지극히 낮추고 살고자 하였다.

조광조(1482~1519)는 개혁정치의 실패자이다. 그는 훈구파인 남곤, 심정 등의 무함으로 1519년 기묘사화에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마시었다. 화순 죽수서원에는 그와 그의 시신을 수습한 양팽손이 배향되어 있다. 이언적(1491~1553)은 중종의 총애를 받았고 강직하였다. 처음 이름은 적(迪)이었는데, 중종 임금께서 언(彦)자를 넣도록 명하여 언적이 되었다. 그는 외척 윤원형이 득세하자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보니 경현서원은 1498년 무오사화에서 1547년 정미사화까지 50년간에 희생된 사림들이 모여 있다.

두 번째는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이은 유학자가 이곳에 모여 있는 점이다. 고봉 기대승이 1567년 10월23일 경연에서 선조임금에게 성리학의 정통이 정몽주,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짐을 이야기 한 바 있듯이 조선 성리학은 조광조 이후에 퇴계 이황(1501-1570)으로 그 맥을 이어진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가 고봉 기대승(1527-1572)이었는데 아깝게도 퇴계가 돌아가신 후 2년도 안되어 고봉이 별세한다. 그리고 영남 유학은 학봉 김성일이 그 맥을 잇는다. 학봉은 퇴계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세 번째 코드는 친구들, 그리고 스승과 제자와의 인연이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서로 친구이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이며, 이황은 기대승과 김성일의 스승이다.

조광조는 17세 때 평안도 어천 찰방(지금의 역장)으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어천에서 살았는데, 인근의 희천에서 유배중인 김굉필을 찾아가 그의 밑에서 2년간 공부를 배웠다.

이황과 기대승은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서로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편지 중에는 조선 성리학의 가장 큰 철학논쟁인 사단칠정논변도 있다. 사단칠정논쟁은 이기일원(理氣一元)인지 이기이원(理氣二元)인지의 논쟁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이황의 영남학파와 이이의 기호학파가 탄생하게 된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경현사에 배양된 신위


네 번째 특징은 영남의 유학자들이 대거 모시어져 있다는 점이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김성일은 영남 사림이다. 이들 사림들이 호남의 중심지 나주에 모시어져 있다는 것이 참 대견스럽다. 영호남 화합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코드를 찾다가 시선이 맨 오른편에 모시어져 있는 김성일의 신위에 멈추었다.

학봉 김성일(1538-1593). 우리는 그를 선조에게 왜나라에 대한 잘못된 정세 보고를 한 인물로 기억한다. 1590년에 선조는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 때 황윤길이 정사이고 김성일이 부사이었다. 1591년에 귀국한 사신들은 선조에게 엇갈린 정세보고를 한다. 서인의 황윤길은 ‘풍신수길이 담력이 있고 눈이 빛나 보인다’며 침략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 데 반하여 동인인 김성일은 ‘풍신수길을 쥐새끼 같다'고 폄하하면서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보고한 것이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죄인 취급을 당한다. 역사에 사죄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초유사로 일하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민심을 한곳으로 모은다. 전장을 누비며 곽재우, 김면, 정인홍등 영남의 의병장들을 독려하여 왜군과 힘겨운 싸움을 한다. 그리고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과 함께 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593년 4월 진주성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는다.

경현서원을 나오면서 의에 대해 생각하여 본다. 의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았고, 개혁정치를 하려다가 좌절을 맛보았고, 산림에 물러나서 후학들을 키웠으며, 국난을 당하여 목숨을 바친 선비들. 의의 길을 간다면 영남 사림이면 어떻고 호남 사림이면 어떠한가. 정의로운 사회, 깨끗한 정치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호남과 영남이란 땅이 무슨 상관인가.

매년 음력 3월7일에 경현서원에서는 영남과 호남의 대유학자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내년 제사에는 영호남의 유림들이 대거 참여하여 영호남이 대화합하기를 기대하여 본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 net

다음 회는 '일재 이항, 태산가를 부르며 학문 닦기를 쉬지 않네 - 정읍시 남고서원, 보림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