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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1, 기대승 , 시비가 분명하여야 나라가 선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1. 고봉 기대승, 시비가 분명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 - 광주 월봉서원, 나주 경현서원
입력시간 : 2009. 12.03. 00:00


월봉서원 전경
퇴계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대학자

어려서부터 박학다식 성리학 정통 밝혀

사단칠정논쟁은 선비들에게 철학적 귀감

1558년 (명종 13년) 10월, 과거에 갓 합격한 선비 한 사람이 조선 성리학의 수퍼스타 퇴계 이황(1501-1570)을 만난다. 탐구심 많은 이 선비는 퇴계의 사단칠정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1559년 1월 퇴계는 그 선비에게 편지를 보낸다.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전해 들었습니다. 나의 생각에도 스스로 전에 한 말이 온당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마는, 그대의 논박을 듣고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단(四端)이 발(發)하는 것은 순리(純理)이기 때문에 언제나 선(善)하고 칠정(七情)이 발하는 것은 겸기(兼氣)이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고 고쳤는데,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단과 칠정의 관계 설정은 그 당시 성리학의 주된 관심이었다. 사단이란 인의예지 (仁義禮智)가 나오는 네 가지 단초를 말하는데, 측은지심은 인의 단초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단초, 사양지심은 예, 시비지심은 지의 단초이다. 칠정은 희로애락애오욕(喜怒愛樂哀惡慾)의 일곱 가지 인간의 정을 말한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은 별개이며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감정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가치 지향적 입장이었다. 퇴계의 주장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불린다.

퇴계의 편지를 받은 선비는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인데 사단은 이(理)로 칠정은 기( 氣)로 분리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편지를 퇴계에게 보낸다. 그는 이와 기는 분리할 수 없으며 사단과 칠정은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논리 지향적이며 이기일원론 입장이다. 이후 퇴계와 그 선비는 1566년까지 8년간에 걸친 조선 성리학의 최대의 사상논쟁인 사단칠정 논변을 치열하게 벌인다.

퇴계와 논쟁을 벌인 이 선비가 바로 고봉 기대승(1527-1572)이다. 그는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원래 고봉 집안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는데 기대승의 작은 아버지 기준(奇遵 1492-1521)이 1519년 기묘사화로 죽자 이에 상심하여 그의 아버지 기진이 광주로 내려온 것이다.

고봉은 박학한 선비였다. 1557년, 그의 나이 31세에 주자학의 시조인 주희(1130-1200)가 쓴 100여권에 달하는 '주자대전'을 독파하여 '주자문록'을 편찬하였다.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변은 당시 유학자들에게 비상한 관심이었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불교 숭상 정책에 눌려 살던 유학자들에게 이 논쟁은 신선한 청량제이었다. 선비들은 두 사람의 편지를 서로 베끼어서 읽어 보고 이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였다.

1563년 가을, 명종왕비 심왕후의 외삼촌인 이조판서 이량이 기대승, 윤두수, 허엽등 신진사림들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량은 이들을 제거하여야 이황, 조식 등 사림의 거두들을 모두 잡을 수 있다는 속셈이었다. 이 때 이량은 기대승을 신진 사림의 영수로 지목한다. 소기묘(小己卯)라 부른 것이다. 이 일은 명종왕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과 고봉의 사촌형 기대항의 진언으로 명종 임금이 사실의 진상을 알아 이량의 당이 귀양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 이후 고봉은 지도자적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기대승은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넓게 보고 강하게 기억하였으며 기품이 호걸스러워 담론하는 데 있어 좌중 사람들을 능히 복종하게 하였다. 이미 과거에 합격한 뒤로는 청렴한 이름이 났으므로 선비들이 추대하여 영수로 삼았고, 대승도 또한 한 시대를 경륜하는 것으로 자임하였다.

율곡 이이가 '석담일기'에서 고봉을 평한 글이다.

1567년에 명종임금이 별세하고 16살의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세상이 되었다. 고봉은 선조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 그 해 10월 23일 첫 경연의 강사가 바로 사헌부 집의 고봉이었다. 당시에는 퇴계 이황도 안동에서 아직 서울로 올라오지 않아 고봉이 첫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이 강의에서 고봉은 시비가 분명하여야 나라의 기강이 확립됨을 역설한다. 요즘 이야기로 하면 역사 바로 보기를 하여 시비를 가려야 반듯한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성리학의 정통이 정몽주,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짐을 밝히고 조광조와 이언적의 명예회복을 주청하였다.
고봉이 지은 유일한 시조 비 -월봉서원에서 고봉 묘소 가는 길에 있다.


'천하의 일에는 옳고 그름 즉 시비가 없을 수 없으니, 옳고 그름이 분명해진 뒤에야 인심이 복종하여 정사가 순조로워집니다.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인심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실로 천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일시적으로는 비록 이것을 엄폐하고 사람들을 처형하여 입을 막는다 할지라도 그 시비의 본심은 끝내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고봉은 명종에게 언로가 열려 있어야 함을 진언한다.

'언로는 국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언로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지금 언로가 크게 열려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략) 지난번 하늘의 변고로 인하여 직언을 구하였을 때 5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상소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제 또 상께서 그 말의 근원을 끝까지 힐문하고 있습니다. 신은 그 뒤부터 진언하는 자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중략) 행여 사리에 맞지 않고 경솔한 말이 있더라도 심상하게 여기고 용납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자기의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게 하여야 합니다.'

아울러 고봉은 국가는 이익보다는 의로움이 중요시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국가는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의로움을 이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참다운 이는 의에서 나오는 것이니 자기도 편안하고 남도 편안한 것입니다.'

1569년 3월 초에 퇴계 이황은 선조로부터 사직 허락을 받고 마침내 고향 안동으로 돌아간다. 선조는 퇴계에게 학문에 조예 깊은 신하를 추천하라고 한다. 퇴계는 추천을 안 하다가 선조가 세 번까지 묻자 기대승을 추천한다.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도 기대승은 학문을 널리 알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무니 가히 통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수렴 공부는 아직 부족한 듯합니다.'

퇴계가 조목, 정구, 유성룡 등 널리 알려진 영남의 제자들을 젖혀두고 고봉을 선조에게 추천한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1570년 5월 고봉도 퇴계처럼 광주로 낙향한다. 조정에서 지내는 것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원로대신들과의 불화도 있었다. 호오가 분명하고 시비를 가리는데 철저한 고봉으로서는 나라일이 적당하게 넘어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차라리 광주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이나 양성하겠다는 심사이었다.

그는 고향집 근처의 고마산 아래에 서재 낙암을 짓고 후학을 가르친다. 그런데 선조임금이 다시 불렀다. 변무주청사 일을 맡기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문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수정하는 책무를 맡았다. 그러나 몸이 아파 외교문서 변무주를 짓고 대사간 벼슬을 사퇴한다.

1572년 10월, 고봉은 아예 귀향을 한다. 몸이 아파서 도저히 정사를 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을 떠나는 날 친한 선비들이 한강에서 고봉을 전별하였다. 어떤 사람이 고봉에게 물었다. “사대부로서 조정에서 처신할 때 항상 명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고봉은 “기(幾) 세(勢) 사(死) 세 글자면 충분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뜻은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는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고, 나아가 시세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월봉서원 빙월당 마루에 이 글이 적혀 있다. 낙향 도중에 고봉은 병이 더 악화된다. 그는 전북 태인현 근처의 사돈집에서 임종을 한다.

광주 월봉서원과 나주 경현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특히 경현서원에는 퇴계의 신위도 같이 있다. 퇴계와 고봉의 만남은 죽어서도 향기롭다.



호화코 부귀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 까 마는

백년이 못하여서 무덤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엇 하리오.



월봉서원에서 고봉 기대승 묘소로 가는 철학자의 길에는 고봉이 유일하게 지은 시조 비석이 있다. 학문으로 이름을 남긴 고봉. 그의 이름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 남아 있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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