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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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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의 반(反)부패 칼럼] 목민심서 톺아보기 (2)-제1부 부임 [김세곤의 반(反)부패 칼럼] 목민심서 톺아보기 (2)-제1부 부임기자명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 전문강사  입력 2024.12.02 09:19 김세곤 청렴연수원 등록 청렴 전문강사조선 시대의 수령은 지방의 행정, 사법, 재정, 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임금을 대신하여 관장하였다. 다만 지방이라는 공간적 한계와 임기가 제한(보통 3년)된 시간적 한계를 지녔을 뿐이다. 수령은 목민관(牧民官)이라 불렀는데, ‘목민’은 백성을 부양한다는 뜻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1818년에 지은 『목민심서』는 수령의 지방 행정지침서 즉 목민관의 직무와 몸가짐에 대한 책인데 모두 12부이다. 1부 부임, 2부 율기, 3부 봉공, 4부 애민, 5부에서 10부는 6전, 즉 이·호·예·병·형·공..
<김세곤 칼럼> 조선의 청백리–12회 초가집 정승 오리 이원익 (1) 조선의 청백리–12회 초가집 정승 오리 이원익 (1)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두 번의 전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선조 · 광해군 · 인조 3대 임금에 걸쳐 여섯 번 영의정을 한 이가 있다. 바로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다. 오리(梧里)대감으로 불린 81세의 노정승은 1627년에 향리로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비바람도 못 가리는 초가집 한 채였다. 이를 안 인조는 “정승이 된 지 40년인데 초가뿐이냐.”며 경기감사로 하여금 집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이원익은 경기 백성들의 노고가 심하니 병든 신하를 위하여 집을 짓게 할 수는 없다고 극구 사양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경을 위해 집을 짓는다고 말하면 경기 백성들이 반드시 달려올 것이다. 즐겁게 일하고 수고로움을 생각하지 않을 ..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를 척결한 박상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를 척결한 박상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을까? 그것도 폭군 연산군 시절에. 그런 강직한 관리가 있다. 중종 때 청백리에 두 번이나 뽑힌 박상(1474∽1530)이다. 전라도 나주에 소부리(牛夫理)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연산군의 애첩 숙화(淑華)의 아비였다. 그는 토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질렀으나 어느 누구도 살아있는 권력을 감히 손보지 못했다. 1506년 5월 12일의 ‘연산군일기’에는 소부리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전교하였다. ‘숙화의 아비 김소부리가 나주로 내려갈 때 말을 지급하라.’ 소부리는 나주의 종으로 숙화가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함을 믿고 교만방자하므..
[역사이야기] 청백리 기건, 애민(愛民)하다 [역사이야기] 청백리 기건, 애민(愛民)하다 천지일보 (newscj@newscj.com) 승인 2022.04.28 18:42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목민관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愛民)’은 거창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실천 하나가 백성들에게 감동을 준다. 이런 선비가 청백리 기건(奇虔?~1460)이다. 호는 청파(靑坡)인데 집이 청파(靑坡 서울시 청파동)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다. 그는 걸어서 성균관에 다니면서 ‘대학, 중용’ 등을 외우곤 했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발탁됐다. 일찍이 황해도 연안(延安) 군수가 됐는데, 군민(郡民)들이 군수에게 붕어를 바치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기건은 3년 동안 붕어를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
청백리 퇴계 이황 청백리 퇴계 이황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퇴계 이황(1501∽1570)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1천 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청백리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황은 1551년(명종 6)에 청백리에 뽑혔다. 퇴계(退溪)는 항상 물러나고자 하였다. 이황은 1545년 을사사화 이후 병약(病弱)을 구실삼아 관직을 사퇴하였다. 1546년에 그는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의 바위 위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이때 실개천 토계를 퇴계(退溪)로 고치고,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안동시 퇴계 종택 앞에는 퇴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몸이 벼슬에서 물러나니 어리석은 내 분수에 편안한데 학문은 퇴보하니 늘그막이 걱정스럽네. 이 ..
‘고양이’ 시와 묘서동처 (猫鼠同處) ‘고양이’ 시와 묘서동처 (猫鼠同處)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1800년 6월에 개혁 군주 정조가 별세하자 정약용(1762~1836)에게 불행이 닥쳤다. 그는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 갔다. 1803년 가을에 정약용은 ‘애절양(哀絶陽)’ 시를 지었다. 낳은 지 사흘밖에 안 된 남자아이와 상복 벗은 지 오래된 시아버지가 군적(軍籍)에 올랐다. 아전은 군포세(軍布稅)를 안 냈다는 이유로 소마저 끌고 갔다. 그러자 백성은 칼을 뽑아 자신의 양경(陽莖)을 자르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곤욕을 당한다.”고 외쳤다. 이어서 정약용은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치우다.’ 시를 지었다. 소나무를 선량한 백성, 송충이를 탐관오리로 읊은 우화시(寓話詩)였다. 1809..
[역사이야기] 청백리 류성룡과 ‘징비록’ (3) [역사이야기] 청백리 류성룡과 ‘징비록’ (3) 천지일보 (newscj@newscj.com) 승인 2020.01.09 18:14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1600년 11월에 선조는 류성룡의 직첩을 돌려주었고, 1601년 12월에는 서용(敍用)의 명을 내렸다. 그러나 류성룡은 조용히 물러나서 말년을 보내도록 해달라고..
청백리 류성룡과 <징비록> #1 청백리 류성룡과 &lt;징비록&gt; #1제3의길2019.10.290라이프/기타, 라이프/기타 &gt; 라이프/기타 TOP ¶글쓴이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호남역사연구원장) -류성룡, 이원익과 함께 청백리로 뽑혀. 영의정 이항복 “미오(郿塢)의 무고 씻어 주기 위함이라”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