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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코로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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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13) - 김천일과 고경명의 근왕(勤王)의병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13) - 김천일과 고경명의 근왕(勤王)의병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호남 의병은 근왕 의병 호남 의병은 향토방위의 영남 의병과는 달리 근왕의병이었다. 한양을 다시 찾고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창의였다. 이는 선조가 개성으로 파천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절망하자, 호종한 류성룡이 “호남의 충의지사들이 머지않아 봉기할 것”이라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 1번째 기사). # 나주의 김천일, 먼저 창의하다. 5월 초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8천 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올라갔다가 선조가 파천했다는 소식에 “지금 임금의 행차가 서도로 가서 그 존망을 알 수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전주로 돌아와 버렸..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12회 이순신, 합포 ·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12회 이순신, 합포 ·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하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592년 5월 7일 거제도 옥포에서 첫 승리를 한 이순신은 북상하여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항해하였다. 그런데 오후 4시경에 척후선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왜선 5척이 멀지 않는 바다를 지나갔습니다.” 이순신은 즉시 출동하여 이들을 추격했다. 이순신 함대가 한두 시간 계속 추격하자 다급한 일본 수군은 웅천 땅 합포 앞바다(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학개마을)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다. 이순신 함대는 포구로 쳐들어가 왜선 5척을 분멸하였다. 사도 첨사 김완, 방답첨사 이순신, 광양현감 어영담이 각각 왜 대선 1척을, 방답진에서 귀양살이 하던 전 첨사..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7회 이순신, 원균의 출전 요청을 거절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7회 이순신, 원균의 출전 요청을 거절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승인 2022.08.08 09:57 1592년 4월 20일에 이순신은 출전 준비를 하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 사이에 원균은 소비포 권관 이영남을 보내 출전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정의 출전 명령이 없다며 원균의 요청을 거절했다. 먼저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어보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가 이억기 등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서 적병을 크게 부수었다. 사실 처음에는 대규모의 왜적이 상륙하자 원균은 그 형세가 너무 큰데 놀라 감히 나가 싸우지도 못하고 전선 1백여 척과 화포, 무기 등을 바다 속에 가라앉혔다. 그는 수하 비장 ..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7) - 척후도 안 세운 이일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7) - 척후도 안 세운 이일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592년 4월 25일에 왜적이 상주에 침입하자 순변사 이일(1538∼1601)이 패하여 도주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18,700명은 4월 15일에 동래성을 함락시킨 후 18일엔 밀양을 점령했다. 이후 청도·대구를 거쳐 상주에 이르러 이일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먼저 4월 17일의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변경의 보고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일로 순변사를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종사관 박호·윤섬등은 다 전사하고 이일은 단기(單騎)로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내용이 너무 간략하다. 그런데 과 류성룡의 , 이긍익의 , 조경남의 등은 상주 전..
임진왜란 다시 보기 - 5-6회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5) - 도망치기 바쁜 경상감사와 수령들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밀양부사 박진의 용맹 1592년 4월 15일에 동래성에서 도망친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 소산역에서 밀양부사 박진(1560~1597)을 만났다. 박진은 급히 동래로 가다가, 동래성이 함락되자 소산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박진은 이각에게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이 위태하니 내가 앞을 막거든, 공은 그 뒤를 지키라” 하면서 5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군 앞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각은 도망쳐 버렸다. 후방이 없어지자 박진도 후퇴하여 밀양으로 돌아왔다. (박동량 ‘기재사초’) 4월 16일에 고니시는 길을 나누어 한패는 언양을 침범하고 다른 한패는 밀양을 침범했다. 이때 박진이 군관..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4) - 동래부사 송상현의 순절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4) - 동래부사 송상현의 순절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경상 좌병사 이각은 도망치고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은 지역 군민(軍民)과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지켰다. 양산군수 조영규(전남 장성군 출신)도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그런데 좌병영에서 달려온 경상좌병사 이각은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동래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치겠다.”고 핑계대고 조방장과 함께 달아나 버렸다. 송상현이 동래성을 같이 지키자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3회 거북선 이야기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3회 거북선 이야기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이순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거북선이다. 서울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에도 거북선이 앞에 있다. 우리는 거북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선 네 가지를 알아보자. 1.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 2. 거북선이 건조된 때는? 3 거북선 첫 출전은 어느 해전이었나? 4. 한산대첩에 거북선은 몇 척 출전했나? 첫째, 누구나 거북선을 창제한 이는 이순신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순신이 직접 거북선을 설계하고 건조한 것은 아니리라. 거북선을 만든 실무 책임자는 나주 출신 나대용이다. 그는 1591년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감조전선 출납군병 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 전선 건조를 감독하고, 군..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1회 임진왜란, 동아시아 세계대전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1회 임진왜란, 동아시아판 세계대전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임진왜란은 조선을 고통과 혼란의 소용돌이로 만든 ‘동아시아판 세계 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 없이 2백 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1592년 4월 13일에 명나라를 친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미리 대비할 수 있었지만 선조의 무능과 당파싸움, 그리고 장수들의 오만이 조선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1589년 8월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선조에게 통신사 파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