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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2, 절개와 겸양의 선비 , 박순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2. 사암 박순, 절개와 겸양으로 사림의 재상 되다 - 광주 송호영당, 나주 월정서원
입력시간 : 2009. 12.10. 00:00


나주시 노안면 월정서원
외유내강으로 세도정치 척결한 선비

윤원형 일파 죽을 각오로 탄핵 사림정치 되찾아

이황에 대제학 양보한 겸양에 문장에도 뛰어나

1565년 4월, 조선의 서태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정국은 요동쳤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는 20년간 지속된 외척 윤원형의 세도가 그대로 유지될 지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런데 대사간 박순(1523-1589)이 척결에 앞장섰다. 8월초에 대사헌 이탁을 설득하여 양사 합동으로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늘을 찌르던 권력자 윤원형을 탄핵한 박순의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세도를 만회하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이제 죽을 자리에 왔다'라는 각오로 한 결단이었다. 윤원형은 한 번의 상소로 물러나지 않았다. 박순은 첫 번째 상소 11일 만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이번에는 윤원형의 부정과 비리를 26가지나 상세하게 열거하여 밝히었다. 물론 요부 정난정에 관한 사항도 포함되었다.

명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외삼촌인 윤원형을 파직시키었다. 박순은 명종비 심왕후의 외삼촌 이량도 그런 방법으로 쫓아내었다. 마침내 외척들은 물러나고 사림들의 정치가 제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박순은 사림의 리더가 되었다.

사암 박순. 그는 나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성유수를 한 박우이고 큰 아버지는 1515년에 신비복위소를 올린 기묘명현 눌재 박상이다. 박순은 황진이에게도 넘어가지 않은 화담 서경덕에게 공부를 배웠고 중년에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나이 31세인 1553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고 3년 후, 밀수품을 단속하는 임무를 맡은 수은어사가 되어 의주에서 문정왕후 소생인 의혜공주의 밀수품을 압수하였다. 왕족의 부정행위를 파헤친 것이다. 요즘 같으면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기획수사를 한 것이다.

1561년에 박순은 임백령 시호 사건으로 시련을 겪는다. 을사사화의 주역 임백령이 1546년에 죽자 이를 슬퍼한 윤원형이 시호를 내리도록 명종을 부추긴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그의 시호를 지으려 하지 않았다.
박순 영정


박순은 임백령이 박상의 제자라는 인연을 생각하여 소공(昭恭)이라는 시호를 지어 올렸다. ‘이미 과오가 있으나 고칠 수 있다’는 소와 '모습과 거동이 공손하다’라는 공을 쓴 것이다. 윤원형은 격분하였다. 명종을 보위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에게 충이나 문자의 시호를 올리지 않다니. 지금도 을사년 일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니. 이 사건으로 박순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귀향을 한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도 이를 애석해 하였다. 주변 사람들의 동정이 많아서였을까. 박순은 얼마 안 되어 한산군수로 보직을 받는다.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박순은 대제학이 된다. 이때 그가 퇴계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것은 겸양의 극치로 남아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사암능양(思庵能讓)이란 글을 쓴다. 사암(박순의 호)이 겸양에 능하다는 글이다.

우리 선조 조정에 퇴계 선생이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자, 그때 대제학 박순이 “신(臣)이 대제학인데 퇴계 선생은 제학이니, 나이 높은 큰 선비를 낮은 지위에 두고 초학자가 도리어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 쓰는 것이 뒤바꿔졌습니다. 청컨대 그 임무를 교체해 주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령하자, 모두 박순의 말이 당연하다 하므로 이에 박순과 서로 바꿀 것을 명령했으니, 아름다워라! 박순의 그 훌륭함이. 충분히 세속의 모범이 될 만하다. 지금에는 이욕만 챙겨 이런 것을 보고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

이 겸양의 사례는 선조수정실록 원년(1568)에도 나온다. 1569년에 안동 도산으로 물러난 퇴계는 사암을 칭찬하기를, “화숙 (화숙은 박순의 자)과 마주하고 있으면 한 덩어리 맑은 얼음과 같아 정신이 아주 상쾌하다‘고 하였다. 고봉 기대승 또한 박순을 평하기를 “의리를 분석함이 밝고 또 아주 절실하니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라고 하였다.

박순은 승승장구한다. 1569년에 이조판서가 되고 1572년에 우의정, 그 다음해에 좌의정 그리고 1579년에는 영의정이 된다. 그리고 1586년에 물러날 때 까지 14년간을 내리 정승의 자리에서 일한다. 박순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 친하였다. 1583년 율곡 이이가 탄핵을 당하고 돌아가자 우계 성혼이 상소하였다. 임금이 성혼의 상소문과 이이의 죄의 유무를 묻자, 박순이 맨 먼저 아뢰기를, “지금 사람들이 이이와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니 탄핵한 것은 공론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탄핵한 자를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를 보고 논박하는 자들은 “박순이 바로 이이요 이이가 바로 성혼이라, 이 세 사람은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 라고 일컬었다.

선조 임금의 신임은 두터웠다. 선조는 “박순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와 지조가 있고 물과 달 같은 정신이 있다”고 두둔하였다.

그러나 1585년 이후 동서분쟁이 극심하여 지자, 서인인 박순은 탄핵을 받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경기도 영평현, 지금의 포천군의 강가에서 거처하였다.

박순이 떠나는 날, 선조는 박순에게 동대문 밖 보제원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다. 박순은 다음 시를 부채에 써서 선조에게 보내었다.
송호영당




은혜에 보답할 재주 없음이 마음에 거리껴

늙은 몸 추슬러 시골집으로 돌아가네.

한 점 남산은 볼수록 점점 멀어져 가는 데

가을바람에 눈물이 은자의 옷을 적시네.



박순은 문장에도 뛰어 났다. 느낌대로 진솔하게 시를 잘 지었다. 명나라 사신 구희직(歐希稷)이 조선에 올 때 박순은 예조판서로 접빈사가 되었는데, 구희직이 박순의 시를 보고 "송대(宋代)의 인물이요, 당(唐)의 격조이다” 라고 칭송하였다.

당풍의 시를 쓴 박순은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등 삼당시인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부안 기생 매창의 연인 유희경도 박순에게 시를 배웠다. 이달은 서얼이요, 유희경은 천민출신인데도 박순은 신분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박순의 시 중에는 면앙정 30영 등 호남의 자연을 읊은 시도 많지만, 유독 절창의 하나로 꼽히는 시는 ‘방조운백(訪曹雲伯 조처사의 산속 집을 찾아가면서)’ 이라는 시이다.



취하여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넓은 골짜기에 흰 구름 가득하고 마침 달이 지는 구나

서둘러 홀로 걸어 쭉쭉 뻗은 숲 밖으로 나오니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자던 새가 알아듣네.

醉睡仙家覺後疑

白雲平壑月沈時

翛然獨出脩林外

石逕笻音宿鳥知



참으로 명시이다.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에 자던 새가 듣더라’는 시 구절이 얼마나 유명했으면 박순의 닉네임이 ‘박숙조(朴宿鳥)’

‘숙조지(宿鳥知) 선생’이었을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일화이다.

박순은 아들은 없고 딸만 하나 있었다. 딸아이가 꽃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너무 예뻐 지은 시가 있다.



딸아이 똘망똘망한 게 겨우 젖 떨어져

예쁘게 빨간 치마 입고 마냥 좋아하는구나.

웃으며 해당화 한 잎을 따서는

귀여운 이마에 부치고는 연지라고 하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박용철 시인 생가 뒤에 송호영당이 있다. 여기에는 사암 박순과 눌재 박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월정서원에는 박순의 신위가 있다. 심의겸, 정철, 김계휘등 서인의 영수들이 같이 배향되어 있다. 사암 박순. 그는 진솔하고 절개 있고 겸양을 갖춘 선비였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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