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0.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송강 정철 - 담양 식영정, 가사문학관, 송강정 |
입력시간 : 2009. 11.26.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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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로 담양 창펴이과 인연… 네차례 낙향
송강정 등 머물며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 남겨
1551년(명종 6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환벽당 주인 김윤제는 낮잠을 자다가 별당 아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잠에서 깨어 용소로 내려 가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그 소년을 만나보니 기상이 좋고 재기가 넘쳐 보였다. 그래서 제자로 삼는다. 그가 바로 정철(1536-1593)이다. 그 때 정철은 순천에 사는 어머니와 둘째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둘째 형은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자 처가인 순천에서 살고 있었다.
송강 정철. 그는 서울 장의동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청와대 근처의 청운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변에 보면 ‘이 언저리 장의동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써진 표석이 있다. 그는 10살 때 까지는 제법 호사스럽게 살았다. 아버지 정유침은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큰 누나가 인종의 후궁이었고 셋째 누나가 왕족 계림군의 부인이었기에 정철은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훗날 명종)과도 소꿉동무로서 잘 어울렸다.
그런데 1545년 7월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에 파란이 일어난다.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삼촌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화에 정철의 매형이요 윤임의 조카인 계림군이 연루된다. 윤원형은 윤임을 모함한다. 윤임이 인종 승하 후 왕위를 계림군에게 넘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런 증거도 없었으나 이 소식을 안 계림군이 미리 겁에 질려 도망을 가는 바람에 혐의가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는 안변 황룡산 기슭에서 삭발하고 스님으로 숨어 있다가 한 달도 못되어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한다.
계림군의 처가인 정철 집안도 그 불똥이 튄다. 정철의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이조정랑이었던 큰 형은 광양으로 유배를 간다. 일은 엎친데 겹치는 것인가. 2년 후에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큰 형은 다시 붙잡혀 와서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가는 도중에 죽는다.
이리하여 정철은 1545년 을사사화이후 1551년 아버지의 유배가 풀릴 때 까지 6년간을 공부도 제대로 못 배운 채 유배지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유배가 풀리자 정철과 그의 가족은 조부의 묘가 있는 창평 지실마을로 이사를 온다. 여기에서 정철은 26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갈 때 까지 11년간을 창평에서 산다.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김윤제, 송순, 임억령, 김인후, 기대승등 당대의 큰 선비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우고 시도 쓰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정철은 17세에 김윤제의 외손녀인 문화유씨와 결혼을 한다. 김윤제의 사위인 유강항은 처음에는 정철과 자기 외동딸과의 결혼에 탐탁하지 않았다 한다. 객지에서 온 정철에게 무남독녀를 성큼 내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김윤제는 이 결혼을 꼭 성사 시키고 싶었나 보다. 사위가 시큰둥하자 절교 선언을 한 것이다. 유강항은 이런 장인의 행동에 너무 당황하여 결국 결혼 승낙을 하였다 한다.
무등산 아래에서의 김윤제의 영향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는 재산도 많았다 하며 환벽당과 성산 지곡마을 사이의 개울에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가 금다리라고 소문이 나서 조정에서 감사가 나오기도 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송강 정철은 학문을 배우고 국문가사와 한시를 짓는데도 김윤제의 덕을 톡톡히 본다. 송강은 송순에게 국문 가사를 배우고 , 김인후에게 도학과 절의를, 기대승으로부터 성리학을, 임억령에게 한시를 배웠는데 이들은 모두 김윤제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는 김윤제의 처남이었고, 양산보와 김인후는 사돈 간이고, 양산보와 송순과는 이종간이었다. 그리고 김윤제의 제자이자 조카가 김성원인데, 김성원의 장인이 임억령이었다. 또한 김윤제는 나주 목사시절에 기대승이 쓴 '주자문록'을 발간하여 준 고봉의 후원자이었다.
정철은 빼어난 인물이었다. 고봉 기대승이 일찍이 산에 올라가다가 맑고 깨끗한 수석 한 개를 보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고봉에게 묻기를 “세상사람 중 이같이 맑은 돌에 비길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니, 고봉이 “오직 정철이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562년에 정철은 과거에 장원급제 한다. 명종은 그의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잔치에 반찬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해 3월 정철은 사헌부 지평으로 일한다. 이 때 경양군 사건이 일어난다. 경양군은 처갓집 재산을 빼앗으려고 처남을 죽이고 그 흔적을 없애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된 것이다. 명종은 정철에게 사촌형인 경양군을 너그럽게 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정철은 임금의 부탁을 거절하였고 경양군은 끝내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 인하여 명종은 정철을 찬밥 신세로 만든다. 그러나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이조좌랑으로 인사 실무책임자가 되는 청요직을 맡게 되고 승승장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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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송강은 벼슬을 하면서 4번이나 창평에 낙향한다. 처음 낙향은 1575년, 그의 나이 40세 때이다. 이 무렵 동서분쟁이 본격화되어 송강은 서인으로서 동인과 대립하였는데 그만 창평으로 낙향을 한다. 그리고 1577년까지 2년간 창평에 머무른다. 이때 그는 '성산별곡'을 지었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두 번째는 그의 나이 44세 때인 1579년 8월부터 1580년 1월까지 5개월간이다. 이후 그는 강원도관찰사 벼슬을 제수 받는데 '관동별곡'의 첫 머리에는 이 당시의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 백리에 방면을 맡기시어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세 번째 낙향은 그의 나이 46세 때. 1581년 6월부터 그해 12월까지 6개월간이다. 이후 그는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된다.
마지막 낙향은 1585년, 그의 나이 50세 때이다. 그는 대사헌으로 일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말을 타고 출입을 하여 총마어사로 불리는 등 권세를 누렸다. 그런데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난 후 서인의 중심인물이 된 그는 동인의 논핵을 받아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에 머물렀으나 끝내 1585년 8월에 창평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때 그는 주로 송강정에 머무르면서 정치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문학적으로는 불후의 명작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짓는다. 이 사미인(思美人) 국문 가사들은 선조 임금을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인데 굴원의 이소에 견주어 동방의 이소라 평하고 있다. 1589년 10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우의정으로 발탁되고 기축옥사의 조사책임자가 된다.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 담양 식영정을 간다. 식영정에는 성산별곡비가 세워져 있고, 비 뒷면에 담양과 정철에 대한 내력이 적혀 있다. 비 옆에 서 있는 낙락장송 소나무도 일품이다. 가사문학관에는 송강가사가 전시되어 있고, 송강정에는 사미인곡비가 있다.
이 몸 삼기실제 임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있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노여 업다.
송강 정철. 그는 국문시가의 개척자이다. 우리나라 말의 조형성을 가장 아름답고 감칠맛 나게 표현한 시인이다. 그리고 남도 땅 창평은 송강 가사 문학을 탄생시킨 본향이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고봉 기대승, 시비가 분명하여야 나라가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 광주 월봉 서원, 나주 경현서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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