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7. 기준의 죽음과 그의 형 기진의 광주 이사 |
입력시간 : 2009. 07.16.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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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큰 선비 기대승을 낳다
기묘사화로 기씨 집안 풍비박산 되자 남쪽 행
아버지 기진 광주 신룡동에 오남재 짓고 정착
퇴계 이황(1501-1570)과 사단칠정논변을 한 고봉 기대승(1527-1572)은 조선 성리학의 꽃을 피운 호남의 큰 선비이다. 광주시 광산구 너브실 마을에 있는 월봉서원의 묘정비에는 그의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적혀 있다.
'선생의 휘는 대승(大升)이고, 자는 명언(明彦)이며, 호는 고봉(高峯)이고 또 존재(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奇氏)로 행주(幸州) 사람이다. 고(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호가 복재(服齋)인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 때 복재가 화를 입자 세상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 고룡향(古龍鄕)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 강씨로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다. 중종 22년(1527)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났다.'
여기에서 주목 할 것은 기씨 집안은 대대로 서울에 살았는데 기대승의 아버지 기진(1487-1555)은 아우 기준(1492-1521)이 1519년 기묘사화로 화를 입자 세상일을 멀리하고 광주에 내려와 살게 되었고 그리하여 기대승이 광주에서 태어난 것이다.
먼저 기묘명현 기준(奇遵)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는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한 사림으로서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 정자, 수찬(修撰)등을 역임했다.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안인 균전법을 중종 임금에게 건의하여 훈구파로부터 질시를 받기도 하였다.
홍문관 응교(정4품)였던 그는 1519년(중종 14년) 11월 15일 기묘사화가 일어난 날 밤에 당직을 하던 중, 조광조 김식 김정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다음날 그는 조광조의 과격한 논의에 아부하였다는 이유로 국문을 받았는데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신은 나이 28세입니다. 소년 적부터 옛사람의 글을 읽었습니다. 집에 있으면 효도와 우애를 정성껏 하는 것이 마땅하고, 조정에 있으면 충성과 의리를 정성껏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뜻이 같은 사람과 옛 도를 강구하여 나라를 요순(堯舜)시대의 다스림과 같은 경지에 이르도록 기약하였습니다. 선한 자는 허락하고 선하지 못한 자는 미워하였습니다. 조광조는 어렸을 때부터 교유하였고, 김식 김구 김정은 근래에 상종하였는데, 그들의 논의가 과격한지 모르고 교유하였을 뿐이며 아부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결국 충청도 아산으로 유배된다. 이보다 앞서 기준의 맏형인 기형(奇逈)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무장(茂長) 현감으로 있었다. (기준 집안은 5형제로서 기형은 첫째이고 기진이 넷째, 기준은 막내이다.) 기준은 울적한 마음에 어머니 계신 곳을 바라보고 회포를 풀고자 고을 사람과 함께 산에 올랐다. 첩첩한 산이 하늘을 버티어서 어머니 계신 곳이 더욱 아득하여 그는 그냥 도로 배소에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함경도 온성으로 옮겨졌는데 아산에서 배소를 이탈한 일이 발각되어 1520년 5월에 한양의 의금부로 잡혀와 추국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아산 현감은 자기가 무거운 죄를 받을까 두려워 그가 도망쳤다가 돌아왔다고 진술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옥에 갇혔고 형장에서 주리가 틀어지고 살이 찢기는 국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피투성이 상태에서도 임금에게 죄 없음을 상소하여 겨우 죽음만은 면한다.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지 온성에서 가시울타리가 처지는 위리안치를 당한다. 그 뒤 1521년 10월에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자 그는 죽임을 당한다.
'기묘록'과 '학산초담'에는 그의 죽음과 관련된 시들이 적혀 있다. '기묘록'은 기준의 꿈 이야기를 적고 있다. 그가 하루는 궁궐에서 당직을 하다가 꿈에 꾸었다. 꿈에 나그네가 되어 국경 바깥의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정처 없이 헤매었는데 고난이 너무 심하여 길가에서 시 한수를 읊조렸다고 한다.
낯 선 이 먼 땅의 강산도 고향 땅과 같은데
하늘 끝에서 눈물 흘리며 외로운 배에 의지하였네.
검은 구름은 끝없는데 강의 관문(河關)은 닫혔고
고목은 떨어져 쓸쓸한데 성곽은 텅 비었네
들길은 가늘게 가을 풀 속에 갈라졌고
인가는 아스라이 석양 속에 담겨 있네.
만 리 길 가는 돛배는 돌아오지 않으니
푸른 바다 아득히 소식조차 끊기었구나.
너무나 뒤숭숭하여 꿈에서 깨어 보니 꿈에 읊조린 시가 생생하였다. 그래서 이 시를 당직실 벽에 적어 두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화를 당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를 가는 도중에 보는 풍경이 바로 꿈에서 읊었던 시의 내용과 똑 같았다는 것이다. 유배 길에 그는 말을 멈추고 시를 읊으며 처절히 흐느끼니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뿌리었다 한다.
'기묘록'에는 “사람 일은 모두 먼저 정해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많은 선비들이 이 시를 서로 전하면서 애석해 하였다”고 적고 있다.
다음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학산초담'에 실려 있는 그의 절명시이다. 그는 30살의 젊은 나이에 삭풍이 몰아치는 두만강변의 함경도 온성에서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이 시를 읊었다.
해 떨어져 하늘은 칠흑과도 같고
산은 깊어 골짜기가 구름과 같네.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
日落天如黑 일락천여흑
山深谷似雲 산심곡사운
君臣千載意 군신천재의
惆悵一孤墳 추창일고분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으나 다가오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비참함이 가득 배인 시이다. 한편으로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질 정도로 비장함과 참담함이 느껴진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기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자 기준의 형제들은 크게 상심하며 남쪽으로 내려가 숨어 살기로 한다. 둘째 형 기원(奇遠)은 장성으로 이거하고 넷째 형 기진(奇進)은 광주 소고룡리에 정착한다. 이 광주 소고룡리가 바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 마을이다.
신룡동 용동 마을 입구 근처에는 ‘덕성군 물재 기공 유허비’가 있다. 이 유허비 자리가 기진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이라고 한다. 유허비에서 조금 가면 고가 기와집 한 채가 나온다. 대문에는 '행주기씨 덕성군 문중'이라고 팻말이 붙어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오남재(吾南齎)이다.
오남재를 물재공 기진 입장에서 풀이하면 재미있다. “내가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오도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뒷산에 기진과 그의 부인 진주 강씨의 묘가 있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벽파를 건너며, 기묘명현 김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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