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5. 최부, '표해록'을 쓰다 - 광주 무양서원 |
입력시간 : 2009. 06.18.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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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상 위해 귀향선 타던 중 폭풍우 만나 중국행
6개월 8천리 고행길 일기체로 기록한 기행서 집필
조선 성종 19년(1488년) 정월 그믐 날, 제주도에 파견되어 일을 하고 있던 조정의 관료 한 사람이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전라도 나주로 초상을 치르러 가기 위하여 급히 배를 띄웠다. 그런데 군관, 향리, 관노 등 모두 43명이 탄 배는 추자도 근처에서 태풍을 만났다. 10여일을 강풍과 폭우 속에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 강남의 절강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하였다.
살았다고 환호를 한 순간 고난이 또 닥쳐왔다. 왜구로 몰린 것이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황에서 고급 관료가 필담으로 조선의 역사와 인물, 예의범절 등 여러 이야기를 잘하여 그들은 혐의를 벗는다.
그리고 중국 관리와 군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항주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이른다. 북경에서 그들은 황제를 알현한다. 부친상을 당한 관료는 황제 알현 시에도 상복을 고집하여 명나라 측과 실랑이가 벌어진다.
결국 이 일은 알현 시에만 잠시 예복을 입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이후 이들은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귀환한다. 제주도를 떠난 지 6개월 만에 8천 여리의 험난한 길을 돌아온 것이다.
성종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총책임자인 고급관료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그는 그동안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8일 동안에 써서 임금에게 바쳤다.
이 책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고 그 저자는 최부(단종 2년 1454- 연산군 10년 1504)였다.
금남 최부. 그는 나주에서 태어나 해남 정씨와 결혼하여 처가인 해남에서도 살았다. 그의 호 금남(錦南)도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의 금(錦)과 해남의 남(南)을 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사림의 종주(宗主)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를 한 강직하고 청렴한 선비였다.
그의 청렴성은 그와 지지당 송흠(1459-1547)과의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최부와 송흠은 홍문관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고향도 같은 전라도라 가깝게 지내는 터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고향으로 휴가를 갔는데, 하루는 영광 삼계(지금은 장성군)에 사는 송흠이 해남에 있는 최부의 집을 찾아왔다.
점심 겸상을 물린 뒤 최부가 송흠에게 느닷없이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부는 역마는 한양에서 고향집에 올 때까지만 탈 수 있는데 어찌 사사로운 일에 쓰느냐고 질책을 하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최부의 질책에 당황한 송흠은 몹시 부끄러웠다. 그는 영광의 집으로 돌아갈 때는 역마를 끌고 걸어서 갔다.
휴가가 끝나고 얼마 뒤 홍문관을 떠나게 된 송흠은 최부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최부는 “자네는 나이가 젊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라며 타일렀다. (일설에는 최부는 상경하여 송흠을 탄핵하였다고 한다)
최부는 너무나 대쪽 같은 선비였다. 사리사욕과 방탕 그리고 무사안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강직한 간관(諫官)이었다. 그는 훈구대신과 임금의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박하였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까지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한번은 폭군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3월, 사간원 사간(종3품)인 그가 올린 이 상소는 너무나 격렬하여 다음 달에 그가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갈 때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간의 직함을 회수하여 버렸다.
다음 해(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조의제문 사건의 주역인 김종직이 총애하는 제자이면서 이미 연산군 눈 밖에 난 그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붕당을 하였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갔다.
그로부터 6년 뒤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또 끌려 왔다. 곤장 100대에 노비가 되어 거제도로 유배 가는 것으로 되었으나 연산군은 그리하지 않았다. 참형(斬刑)을 명한 것이다. 이 때 썼으리라는 시가 전해진다.
북풍이 다시 세차게 부는데
남녘 길은 어찌 이렇게 멀까.
매화는 차갑게 잔설을 이고
말라버린 연꽃 가지 작은 못 속에 있네.
北風吹更急 북풍취경급
南國路何長 남국로하장
梅冷封殘雪 매냉봉잔설
荷枯立小塘 하고입소당
참형의 어명이 내려진 날. 그 날의 '연산군일기'에는 그에 대한 졸기(卒記)가 이렇게 적혀 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했고 ,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1504년) 10월25일.
광주시 광산구 첨단의 산월초등학교 근처에 무양서원(武陽書院)이 있다. 여기에 최부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그의 외손자 유희춘도 함께 배향되어 있는데 '미암일기'의 저자이기도 한 유희춘은 외할아버지 최부의 글을 모아 '금남집'을 엮었고 선조 2년(1569년)에 다시 간행된 '표해록'의 발문을 썼다.
'(전략) 많이 듣는 것을 구하고 사물을 잘 알고자 노력하는 선비 가운데 이 책을 보고자 하는 이가 많았다. (중략) 아! 이 책이 손상되고 불완전하여 매몰된 지 거의 백년이었는데 지금 오랜 어둠속에서 밖으로 드러나 세상에 널리 전해질 것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유희춘의 '표해록' 발문에서.
6월의 토요일 오후 무양서원에는 공부가 한창이다. 문화재청과 광산구청에서 함께 하는 '무양서원의 아해들' 강좌이다. 최부의 후손들인 호남인들이 유학의 중심 사상인 인(仁)과 의(義)를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로빈손크루소의 표류기' 보다 더 재미있고 문학적인 해양기행 책이고, 원나라 때 만들어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당나라 때 유학 온 일본승려 에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3대 여행기로 해외에서 더 유명한 책인 '표해록' 이름을 들어 보았을까?
명나라 중기 중국의 정치와 사회, 도시와 문화, 생활풍습들을 자세히 묘사하여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높은 이 책을 읽어 보았을까? 더구나 '표해록' 책을 쓴 사람이 바로 무양서원에 신위가 배향되어 있는 호남의 강직한 선비 금남 최부임을 알까?
김세곤 (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멈출 줄을 아는 선비 송흠, 장성 관수정과 기영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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