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4. 순천 옥천서원과 임청대 |
입력시간 : 2009. 06.04.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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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스승 김굉필 늘 선비의 도 지켜
자유분방한 조위 성종 그리움 시에 담아
연산군의 폭정과 방탕이 심해지고 있는 연산군 6년(1500년) 여름 어느 날, 전라도 순천의 옥천(玉川) 시냇가를 배회하는 두 선비가 있었다. 한 사람은 근엄하고 사색하는 표정이었고 또 한 사람은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이들이 바로 김굉필(1454-1504)과 조위(1454-1503)이다.
한훤당 김굉필.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그는 평안도가 흉년이 들자 순천으로 귀양을 왔다. 그는 김종직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일찍이 소학동자라 불리었다. 사람들이 나라 일을 물으면 “소학 읽는 아이가 어찌 큰 뜻을 알겠는가”라고 하였고 '소학을 읽고(讀小學)'라는 시에서 보듯이 항상 소학을 실천하였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책 속에서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 하려 하노니
어찌 구차스레 부귀를 부러워하리오.
스승 김종직이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오를 자로 평하였듯이, 그는 군자가 되기 위한 도를 실천하는 유가의 도학자이었고 평소에 한빙계(寒氷戒)를 계율로 삼았다. 한빙이란 뜻은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차갑다’는 의미이다. 그가 삶의 지표로 삼은 한빙계 18계율은 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 세워 착한 본성을 따르라), 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등이다.
이렇듯 김굉필은 유배 중에도 아침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항상 갓을 쓰고 있었으며 밤늦게 까지 책을 읽으면서 파루 종이 울린 다음에야 잠을 자고 첫닭이 울면 일어났다. 그리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 열심이었다.
그가 조광조의 스승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17세의 조광조는 평안도 어천 찰방(지금의 역장)으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어천에서 살았는데, 인근의 희천에서 유배중인 김굉필을 찾아가 그의 밑에서 2년간 공부를 배웠다.
김굉필은 순천에 유배 와서도 후학들을 가르쳤다. 유계린, 최산두 등이 그의 제자이다. 유계린은 '표해록'을 쓴 최부의 사위이고 기묘사림 유성춘과 '미암일기'를 쓴 유희춘의 아버지이다. 최산두는 기묘사화로 화순 동복으로 유배를 가서 김인후, 유희춘을 가르쳤다.
한편 매계 조위는 김종직의 처남으로서 김굉필과 같이 김종직의 문인이다. 그는 시를 잘 지어서 일찍이 성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 그는 성절사로 중국에 있었는데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조위가 조의제문을 김종직의 문집 점필재집 첫 머리에 수록한 것은 매우 뜻이 있는 것이다”라고 참소하였다. 연산군은 크게 노하여 조위가 강을 건너는 즉시 베어 죽이라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동행한 조위의 이복동생 조신이 요동에 있는 점쟁이 추원결을 찾아 가서 길흉을 물으니, 다만 한 구절의 글을 적어 주었는데 “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을 빼어 나왔으나(千層浪裡翻身出)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 하지(也須巖下宿三宵)”라 하였다.
조위가 압록강에 이르자 다행히 목숨은 면하고 평안도 의주에서 귀양을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 층 물결 속에서 몸을 빼어 나왔다”는 점괘는 알 수 있었으나 다음 구절의 뜻은 알지 못하였다.
조위도 김굉필과 마찬가지로 같은 때에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서문밖에 살면서 옥천을 자주 노닐었다. 여러 늙은이들과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바둑을 두기도 하였으며 시도 읊조렸다. 그는 옥천의 노거수 위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이름을 ‘임청(臨淸)’이라 하였다. 임청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라’는 뜻으로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의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개울(임청류)에 임하여 시를 짓노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유유자적한 조위였으나 마음에는 울분이 가득하였다. 성종임금이 그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는 시로 이러한 심정을 노래하였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유배가사 '만분가(萬憤歌)'이다. 만분가는 129구의 장편가사로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 간 자신의 처지를 천상 백옥경에서 하계(下界)로 쫓겨난 것에 비유하였다. 두견의 넋이 되어 남산 배나무에 앉아 밤낮으로 울고 싶은 심정으로 원통한 사연을 하소연하고, 구름이 되어 옥황상제로 비유된 성종에게 가까이 가서 가슴에 쌓인 말을 실컷 아뢰겠다고 했다.
국문학자들은 이 가사가 나중에 송강 정철이 지은 국문가사 '사미인곡'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학자 김굉필과 시인 조위는 옥천변에서 자주 만났다.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였다. 그런데 조위는 연산군 9년(1503년) 11월에 병으로 죽는다. 울분이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김굉필이 장례를 치러 주었는데 너무나 쓸쓸하였다. 자녀도 없고 조문하는 이도 없었다. 이 소식을 듣자 조광조는 조위를 애도하는 시를 남기었다.
매계가 먼저 가시고 한훤당이 조사(弔辭)를 지으시니
야사에 올해는 슬픔도 가득하다고 하리라.
도를 찾는 일 양지바른 강가의 어린 아이처럼
서릿발 가득한 하늘에서 누런 꽃 보는 것 같구나.
그로부터 1년 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김굉필에게도 화가 미치어 참수령이 떨어졌다. 그는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한 채 손으로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고 순천 저자거리에서 초연히 참수를 당하였다.
1년 전에 죽은 조위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그의 관(棺)이 파헤쳐지고 시체가 베어져서 묘 앞 바위 아래에다 3일 동안 뒹굴었다. 점쟁이의 두 번째 점괘 “그래도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자야하지”가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옥천서원은 명종 19년(1564)에 순천부사 이정이 김굉필을 위하여 경현당을 지은 것이 시초이며 고봉 기대승이 '경현당기'를 썼다. 그 후 선조 1년(1568)에 순천부사 김계의 상소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옥천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호남 사림의 요람이 되었다. 임청대 또한 순천부사 이정이 조위와 김굉필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인데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최부, 해양 표류기행집 표해록를 쓰다. 광주 무양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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