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6. 멈출 줄을 아는 선비, 송흠 |
입력시간 : 2009. 07.02.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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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됨은 효와 충에 있을 따름"
노모 봉양 위해 윤허받아 귀향한 효자
'삼마태수' 일화 등 청백리 표상 면면히
장성군 삼계면에 있는 관수정(觀水亭)을 간다. 관수정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로 송흠(1459 세조 5년-1547 명종 2년 )이 그의 나이 81세인 중종 34년(1539년)에 지은 정자이다.
관수정의 마루 위에는 그의 시가 원운이라는 표시와 함께 붙어 있다.
물을 바라보고 우뚝하게 지은 집 여름에도 시원한데
노부(老夫)는 날마다 난간에 기대어 선다.
골짜기는 두 시냇물이 모두 차지하니
어찌 중국 용문의 팔절탄을 부러워하리.
고요한 그림자 물에 잠기니 참으로 즐길 만하고
날이 개이면 비에 씻긴 모습 즐겨보리
천만가지 모습들이 눈을 어지럽게 하는데
맑은 물결 떠다가 내 속마음을 씻고 싶네.
송흠의 시 바로 옆에는 그의 제자이며 친척인 송순의 차운 시가 걸려 있다. 그의 제자 양팽손, 나세찬, 안처함의 시도 보인다. 이외에도 그와 교류한 소세양, 김안국, 홍언필, 성세창, 신광한, 박우, 이문건, 정순명, 정사룡, 임억령, 오겸, 강종수, 유부, 김익수, 노극창 , 유사, 정희홍, 김인후등 당시에 쟁쟁한 인물들의 차운 시가 걸려 있다.
이 시들을 모두 한글로 번역하면 좋겠다. 중종 시절 호남 선비들의 위상과 중앙정계와의 교류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 자료가 될 것이다.
마루 중간에는 송흠이 쓴 '관수정기'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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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정기
내가 보니 하늘의 한 가운데 달이 이르면 황금색과 푸른색이 물에 떴다가 잠기곤 한다. 비단 주름 사이로 문양이 생겨나고, 이슬비 내리다가 잠깐 개이면 짙고 옅은 그림자가 일렁인다.
바람이 불다가 고요하면 물속에서 헤엄치는 고기비늘까지 세어볼 수 있다. 아침 햇살과 저녁 그늘 기이한 모습과 만 가지 형상은 모두가 관수정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물결을 보면 물의 근본이 있음을 알며, 그 맑음을 보면 마음의 사악한 점을 씻게 되니, 그런 연후에야 가히 물의 참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자손들은 여기에 힘쓸지어다.
이 글을 읽으니 '노자' 제8장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글이 생각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땅처럼 낮은 곳에 거하고
마음은 연못처럼 고요하며
같이 어울릴 때에는 아주 인자하고
말에는 신의가 있고
발라서 잘 다스려지고
일에는 매우 능란하고
움직임이 때를 잘 맞춘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한편 관수정 앞 한 곳에는 비석이 하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1545년 그의 나이 87세에 남기었다는 가훈이다. 비석 앞면에는 원문이 적혀 있고 뒷면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주자의 시에 이르기를 “모든 일은 충과 효 밖에는 바랄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대저 사람이 사람됨은 다만 충과 효에 있을 따름이다. (중략)
왜냐하면 널리 배우고 신중히 생각하며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여 욕심이 적은 것이 바로 충성하고 효도하는 사람이다. (중략)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어느 것이나 충성과 효도 가운데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니 충성과 효도를 한 뒤에야 나는 반드시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중략) 나의 자손들은 삼가하고 경계할진져.
명종 원년 1545년 정월16일에 노옹은 병풍에 섰다.
그의 가훈대로 송흠은 효도와 충성을 실천하였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여러 번 그만두면서 까지 효도를 하였고 청렴하게 살고 백성을 잘 다스리어 청백리로 여러 번 뽑히었다.
1534년 전라도 관찰사 시절, 99세의 노모 봉양을 위해 왕의 윤허를 받고 집에 돌아간 일화는 감동적이다. 그는 101세까지 산 노모를 모시고자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고 어머니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본 후 드렸다고 전해진다. 효성이 지극함은 그의 시호 효헌(孝憲)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그는 청백리였다. 최부로부터 역마를 개인 용도로 썼다하여 그가 혼 줄이 난 것은 이전에 소개한 바 있거니와 그는 청렴을 신조로 삼았다. 수령이 새로 부임지로 갈 때는 전임 고을에서 가장 좋은 말 여덟 마리를 바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세 마리의 말만 받았다. 본인이 탈 말,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이었다. 그리하여 그를 삼마태수라 불렀다.
그는 예산도 절약하였다. 그가 여산 군수로 있을 때는 호산춘이란 술을 손수 빚어 접대비용을 줄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청렴한 행동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으며 그는 다섯 번이나 청백리로 뽑히었다.
한편 관수정 옆을 흐르는 용암천 바로 건너편에는 기영정(耆英亭)이 있다. 기영정은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1487-1547)가 1543년에 중종의 명을 받아 지었다. 기(耆)라 함은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年高德厚)’ 는 뜻인데,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 한다. 영(英)은 풀이나 식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영정이란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노인 중에서 가장 빼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송인수가 송흠을 위해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1544년 3월22일의 조선왕조실록을 보자.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가 영광군에 순찰 나가, 판중추 송흠을 위해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중략)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걸군(乞郡)하여 10여 고을의 원을 지냈고 벼슬이 또한 높았었지만, 일찍이 살림살이를 경영하지 않아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 자주 떨어졌었다. 육경(六卿)에서 은퇴하여 늙어간 사람으로는 근고(近古)에 오직 이 한 사람 뿐이었는데,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관수정이란 편액을 걸고 날마다 한가로이 만족하게 지내기를 일삼았으므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존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후략)
송흠의 묘소는 관수정 바로 뒷산에 있다. 참배를 하면서 그가 효자로 청백리로서 존경 받고 무탈하게 89세까지 장수한 비결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의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지지(知止)는 ‘멈추는 것을 안다’는 의미인데 '노자' 제44장에는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하였고, '대학'에도 “멈춤을 알아야 뜻을 정할 수 있다(知止而后 有定)”고 하였다.
이렇듯 지지당 송흠은 ‘멈출 줄 아는 것’을 신조로 삼고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존경받는 것이리라.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기묘명현 기준의 죽음과 그의 형 기진의 광주 이사-광주 월봉서원' 입니다.
사진/1. 관수정. 정자앞에 송흠의 가훈비가 있다.
2.관수정 마루 위에 걸려 있는 관수정 원운, 차운 시, 관수정기
3.송흠의 묘소. 관수정 바로 뒷산에 있다. 묘비는 윤증이 썼다.
4.기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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