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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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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빙화 消氷花 윤선도의 3번째 귀양은 예송논쟁에서 패배하여 이루어졌다. 효종이 죽고 인조의 계비 조대비의 상복 문제로 당시 서인과 남인은 대립하였다. 서인은 1년설 (기년설)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다가 결국 송시열 송분길이 이끄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남인의 윤선도는 3년설을 가장 강경하게 주장하..
막둥이를 애도함 고산 윤선도(1587-1671)는 17년 간의 귀양살이를 한사람이다. 그는 세번에 걸쳐 귀양을 갔다. 첫 번째 귀양은 그의 나이 30(1616)에 병진소를 올려 당시의 권세가인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가 1618년에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가 되었다. 그리고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자 ..
오우가 6수 - 고산 윤선도 [서사]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다. 게다가 동쪽 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구나. 그만 두자, 이 다섯 가지면 그만이지 이 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水] 구름의 빛깔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윤선도 시조- 견회요, 우후요 윤선도는 나이 30, 1616년 12월(광해군 8년)에 <병진소>를 올린다. 당시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간신 예조 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를 진사 신분으로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1617년 2월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간다. 1618년 그가 경원에서 유배중일 때 지은 시조가 시름의 노래 (견회요) 5수와 , 비..
고산 윤선도 인물 분석 요즘 설날 연휴 기간중에 윤선도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번의 전란을 �은 그에 대하여. 3번의 귀양. 17년 간의 귀양생활. 85세로 세상을 뜬 그는 30세에 광해군 시절 성균관 유생으로 예조판서 이이첨 ( 우리는 그를 간신으로 기억한다.)의 비리를 간하다가 귀양을 간다. (함경..
국문시조의 경지를 개척한 윤선도 윤선도 . 1587-1671 선조,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시기를 산 국문 시조시인 임진왜란을 어린 나이에 겪고 병자호란도 겪은 그는 성격이 너무 강직하여 진사시절에 이이첨을 죽이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가 되어 귀양을 산 이후 세번의 귀양으로 20년 가까이 귀양 살이를 하여야 하였고, 그럼에도 고집이..
무궁화 무궁화 윤선도 오늘 핀 꽃이 내일까지 빛나지 않는 것은 한 꽃으로 두 아침 햇살 보기가 부끄러워서이다. 날마다 새 해님 향해 고개 숙이는 해바라기만 있다면 세상의 옳고 그름을 누구 있어 분별하리. 木槿 목근 甲日花無乙日輝 갑일화무을일휘 一花羞向兩朝輝 일화수향양조휘 葵傾日日如馮道 규경..
해남군청에 소개된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 (1587~1671)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는 우리나라 국문학상 시조시인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송강이 가사문학의 대가라면 고산은 시조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대부분 한문문학과 경직된 사회구조의 틀 속에 갇혀 있을 때 고산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