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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소빙화 消氷花

 

윤선도의 3번째 귀양은  예송논쟁에서 패배하여 이루어졌다. 효종이 죽고  인조의 계비 조대비의 상복 문제로

당시 서인과 남인은 대립하였다. 서인은 1년설 (기년설)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다가 결국 송시열 송분길이 이끄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남인의 윤선도는  3년설을 가장 강경하게 주장하다가  1660년 그의 나이 74세에  함경도 삼수로 귀양을 간다. 삼수갑산 이라는 말이 붙은

함경도 산촌,깡촌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예론을 계속 주장하다가  1661년에는 위라안치까지 당한다. 가시덩쿨로  울타리가 쳐지고 출입이 금지되는 형벌을... ( 그는 그곳에서 1665년 까지 귀양살이를 하다가 1665년 3월에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된다. )

 

이 때 그가 지은 한시가 소빙화이다.

 

그는  이 7언 장시를 지으면서 시를 지은 소회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한역 고산유고 251-253)

 

삼수는 늦봄에도 거의 봄 빛이 없으니 , ' 봄은 왔건만  봄은 오지 않았네 (춘래불사춘) ' 라는 구절을 길이 읊조린다. 

나그네가 있어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미침 빙설속에서 풀꽃을 발견하고  그 화초를 캐어 통에 옮겨 가져오니 또한 눈이 휘둥그레 질만하다.

 

(중략)

그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어떤 사람이 말하기로는 세속에서 소빙화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 서리 눈을 업신여기고 홀로 빼어 난 것이

섣달 매화와 가을 국화 뿐만이 아니구나! 그것이 음기 쌓인 밑바닥에서 양기를 놀래 불어나게 했으니 복괘의 한 획과 같아 ,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성찰을 일으키누나.

 

늦봄  초이튿날 해는 서쪽으로 기우는 데

좁다란 집에 홀로 앉아 옛집을 생각하네

나무꾼이  홀연 누런 옥빛 꽃을 만나

대롱에 옮겨와 촌뜨기에게 자랑하네

 

소빙화는 압록강 물가에 있는 데

짧디 짧은 줄기 하나 바늘같이 가늘어라.

천 길 눈속에서도 살기 殺氣를  밀쳐내고     

한 떨기 꽃 잎에 천심을 담아냈네

 

(중략)

 

향기 자주 맡으며 거듭 감탄하노라

온 수풀 죽은 듯 서 있고 온갖 뿌리 감추었는 데

유독 여리디 여린 옥 꽃 술에 향기 절로 나네

문왕을 기다리지 않아도 호걸이니

닭 울음 그치지 않는 다 하여 또 어찌 상심하리

 

**********************

 

꽃 한송이에서  세상사를 읽는 고산의 시심이 존경스럽습니다.

귀양 살이에서도  임금을 기르는 마음, 그리고 소빙화를  보면서 절개를 읽네요.

 

 

 백두산 (중국 쪽에서  바라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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