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소쇄원에서 3
김세곤 노동부 법무행정팀장
이렇게 귀거래를 한 도연명은 농사 일을 하고 평소 좋아하던 술을 주로 혼자 마시고 책 읽기를 즐기면서 스스로를 오류선생이라고 칭하였다. 스스로 농사 일을 한 시가 <귀원전거歸園田居 5수>이고, 술을 즐겨 마시면서 지은 시가 <음주 飮酒 20수>이며,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여러 세상을 안 것이 <독산해경 13수>이다.
그러면 먼저 <귀원전거>시 한 수를 감상한다.
남산 기슭에 콩을 심었으나
풀만 무성하고 싹이 나지 않아
새벽에 일어나 거친 밭을 손질하고
달과 더불어 호미 메고 돌아오노라
발길 좁고 풀 나무 우거져
밤이슬 적시지만
옷 젖는 것 아깝지 않고
오직 농사일만 잘 되기만 바랄뿐
이제 도연명은 고향에 와서 스스로 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콩을 심었으나 풀만 무성하다. 그래서 새벽부터 밤까지 밭갈이를 하고 옷을 적시나 농사는 별로이다.
한편 그는 술을 즐겼다. 맨 정신으로는 헝클어진 속세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였을까? 그는 홀로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詩 들이 <음주 20수>이다. 그중에서 ‘국화와 술에 관한 시’는 정말 백미이다.
가을 국화 빛이 아름다워
이슬 젖은 꽃잎을 따서
수심 잊은 술에 띄워 마시니
속세 버린 심정은 더욱 깊어라
술잔 하나로 홀로 마시다 취하니
빈 술 단지와 더불어 쓰러지노라
해도 지고 만물이 쉴 무렵에
숲을 향해 돌아오는 새
동쪽 창 아래에서 후련한 마음으로 시를 읊조리니
새삼 참 삶을 되찾는 듯하여라.
또한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책 읽기를 즐겼다. 때로는 밥 먹는 것도 잊고서 책을 보았다. 그런 시가 <독산해경 13수>이다. 산해경은 중국 한나라 전부터 전해오는 박물지이다. 거기에는 지리 풍물을 광범위하게 들어 있고, 기괴한 사람 신선, 동식물 등도 있어 신화나 전설의 근원을 이루는 책이다. <독산해경> 한수를 감상하여 보자.
초여름 풀과 나무 자라서, 집 주위로 우거졌네.
뭇 새들 즐겨 깃들이고, 나 또한 오두막집을 사랑하느니.
밭 갈고 씨 뿌리고 하는 중에, 때때로 돌아와 책 읽는다네.
외진 곳 귀한 손님 올 리 없고, 친한 벗님네나 찾아들까.
반갑게 봄 술 따르고, 터 밭의 푸성귀를 뜯네.
보슬비 동쪽으로부터 내리고, 기분 좋은 바람도 더불어 분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을 두루 보고, 『산해경(山海經)』을 훑어보네.
잠깐 사이에 우주를 돌아보게 되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정말, 자연과 술과 책 그리고 우주와 고독이 함께 있는 시이다.
한편 그는 스스로를 오류선생 五柳先生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는 <오류선생 전 五柳先生傳> 을 자작한다. 이 글은 자화상을 그리되 남을 그리는 듯 객관적이며 해학적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오류선생전 (五柳先生傳)
선생은 어느 곳 출신인지 또 그의 성이나 이름도 잘 알 수 없다.
그의 집 곁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어 그렇게 호를 오류(五柳)로 하였다.
선생의 성품은 한적하고 조용하며 말이 적었으며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했으나 지나치게 따지거나 집착하지 않았으며,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즐거워서 끼니도 잊고 탐독하였다.
타고날 때부터 술을 좋아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언제나 마실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이와 같은 처지를 알고 간혹 술자리를 마련 해 놓고 그를 초대하 면 가서는 언제나 다 마셔 버리곤 하였다. 기약은 반드시 취하는데 있었다. 취하고 난 후에는 물러나며, 떠나는데 마음 아쉬워하지 않았다.
사방이 벽만 둘러 있는 작은 집은 쓸쓸하기만 하고 바람도 비도 가리지 못하였다. 짧은 잠방이는 해져 꿰매 입었고, 밥그릇도 물그릇도 자주 비었 지만 편안하였다. 항상 문장을 써서 스스로 즐기면서 다소나마 자기의 뜻 을 보였다. 득(得)과 실(失)을 마음에 잊는 그런 자세로 자신의 생애를 마 치려했다. 이 얼마나 자연에 묻혀 살려고 하는 마음인가. 스스로를 즐기는 삶이다.
이러한 자연을 즐기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63세로 세상을 뜬 해(427년)에 자기 손으로 썼다는 제문인 <자제문 自祭文>은 처연하다. 그는 이 글 끝머리에 ‘나는 참 힘든 삶을 살았다. 헌데 이제 죽은 후의 세상을 어떨는지? 아! 애달프구나! 人生實難 死如之何 嗚呼哀哉’ 하였다. 아무리 자연에 귀의하고 유유자적하다 할지라도 가난, 궁핍 그리고 비참하였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가식 假飾이 전혀 없다.
나는 이 방에서 도연명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다가 도연명이야 말로 귀거래 歸去來를 제대로 한 사람임을 느낀다. 그러면서 양산보와 김인후와 정철의 귀거래에 대하여 비교를 하여 본다. 양산보. 그는 처음부터 출사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래서 귀거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송강 정철. 그는 벼슬을 하다가 네 번의 낙향이 있었다. 이 낙향은 일시적 은퇴이긴 하나 그것은 항상 출사를 위한 휴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 라는 도연명식 귀거래는 없다. 하서 김인후. 그는 벼슬을 하다가 그의 나이 36세에 인종이 승하하자 아예 낙향하여 죽을 때 까지 15년간을 줄곧 초야에 묻힌 사람이다. 하서만이 진정으로 귀거래가 있다. 나는 ‘도연명의 귀거래’와 관련하여서는 ‘양산보는 숨어사는 사람이요, 정철은 현실을 좇는 사람이며, 김인후는 출처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인물평을 한다.
한편 소쇄원 주인 양산보는 그의 스승인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북송 초기의 성리학자인 주돈이(1017-1073)를 존경하였다 한다. 그래서 주돈이가 쓴 <통서>와 <애련설> <태극도설>을 항상 글방에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주돈이는 <애련설 愛蓮說 >에서 연꽃을 군자의 꽃이라 하고 연꽃처럼 고결한 선비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표현하고 있다.
애련설 愛蓮說
물과 뭍, 풀이나 나무의 꽃 가운데는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진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하였다.
나는 홀로 연꽃이 진흙탕에서 피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었으되 겉은 곧고, 덩굴지지도 않고 가지를 치지도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지고, 우뚝하여 조촐하게 서 있으며, 멀리서 바라보기 알맞되 가까이 두고 함부로 바라볼 수 없음을 사랑하노라. 내 이르노니, 국화는 꽃 가운데 은일하는 자요,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라 하겠다. (菊花之隱逸者, 牧丹之富貴者, 蓮花之君子者!) 아, 국화를 사랑한단 말은 도연명 이후로 듣기 어려우니, 나와 더불어 연꽃을 사랑할 사람은 누가 있을까?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많으리라.
이 <애련설>에 도연명의 국화 사랑이야기가 나오니 나는 여기에서 도연명의 유명한 국화 시 한수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 틈에 농막 짓고 살아도
수레나 말 타고 시끄럽게 찾아오는 자 없노라.
어찌 그럴 수 있는 가 묻기도 하지만
마음 두는 것이 원대하니 몸 담은 땅도 스스로 의지게 되노라
동쪽 울타리에 피어난 국화꽃을 딸 새
무심코 저 멀리 남산이 보이노라
가을 산 기운 저녁에 더욱 좋고
날 새들 짝 지어 둥지로 돌아오니
이러한 경지가 바로 참맛이러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구나!
음주 제5수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輿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이 얼마나 쉽고 담담하게 쓴 시 인가. 인간의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에 귀일하고자 하는 마음인가. 인간이 욕심이 없고 마음이 속세에서 멀어지니 자연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 남산은 여산이다. 도연명이 사는 구강 남쪽에 있다하여 남산이라고 했다. 한문의 견 見은 의식적으로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보인다는 뜻이다. 특히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이란 이 시구는 너무나 유명하여 후대의 글깨나 쓰는 문인들은 국화시를 쓸 때마다 이 구절을 많이 패러디 하였다. (하서의 시에도 그런 부분을 볼 수 있는 시구가 있다.)
또한 <태극도설>은 앞 번의 식영정 글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으나, 태극은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며 태극에서 음양과 오행이 나오고 거기에서 다시 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한편 나는 도연명을 사모하고 주돈이를 존경한 사람은 양산보 뿐만 아니라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도 그랬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하서전집>에 의하면 그는 귀거래사를 수 없이 읽었고 <독귀거래사>라는 글도 지었으며 , 태극도설에 대하여는 너무 정통하여 그의 사후에 정조임금이 그를 ‘해동의 주돈이’ 라고 했을 정도이다. 바로 이 제월당 방에서 두 사람이 <귀거래사>와 <애련설>을 읊고 <태극도설>의 오묘한 이치를 논하였으리라.
퇴계 이황도 도연명을 유달리 흠모하였다 한다. 그는 화도집음주 和陶集飮酒20수와 화도집이거운 和陶集移居韻 2수를 지었다. ‘한 잔의 술을 홀로 마시며 한가롭게 도연명의 시를 읊노라. 시내사이를 거닐며 후련한 심정으로 즐기노라.’(화도집이거운 제2수). ‘ 우뚝 솟은 도연명 노인을 한평생 아침저녁으로 친애하네. 넘실대는 큰 물결 속에서도 오직 그대만은 나루터에서 헤매지 않았네.’(화도집 음주 제20수). 사실 당시 조선의 대부분의 선비들은 도연명과 주자 주돈이를 흠모하고 그에 대한 책을 한 두 번 씩 은 읽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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