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에서
양산보, 김인후 그리고 정철의 흔적
식영정에서 소쇄원 주차장 까지는 1Km 정도이다. 소쇄원으로 가는 길 양옆에는 목백일홍이 활짝 피어 있다. 진한 분홍색 꽃이 길에 피어 있으니 송강이 살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소쇄원 주차장에 내리니 바로 소쇄원 안내판과 성산 등산로 안내판이 있다. 이 안내판을 얼핏 보고 사진을 찍은 다음에 소쇄원까지 걸어간다. 소쇄원으로 걸어가는 길은 울창한 대밭이다. 푸른 왕대가 즐비한 대숲 길은 매우 운치가 있다.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 요즘은 웰빙 식품으로서 대단히 각광받고 있는 대나무 숲을 걸으니 마음 또한 청량하다.
소쇄원은 남쪽으로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장원봉과 까치봉을 잇는 산줄기를 뒤에 엎고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원림이다. 그 경치가 마치 주자가 성리학을 가르쳤다는 중국의 무이구곡 같은 원림. 이 원림의 주인은 소쇄옹 양산보(1503-1557)이다. 그의 본관은 제주이고 자는 언진으로서 이곳 창평 창암촌에서 창암 양사원의 3남으로 태어났다. 창암공은 그가 15세 되던 해(1517년)에 그를 서울의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 수학시킨다. 이 때 그는 성수침, 성수종 형제와 같이 소학을 배운다. 그 당시 대사헌인 조광조는 중종의 총애를 받아 개혁정치와 지치주의 실현에 박차를 가하던 때였다. 17세(1519년)에 양산보는 현량과에 응시하여 합격을 하나 합격자 수가 너무 많아 발표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빠진다. 그런데 그 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이 남곤, 심정등 보수 세력에 의해 좌절이 되고 중종도 조광조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조광조는 화순 능주의 적려유허지에 귀양 온 지 한 달 만에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그가 죽으면서 쓴 절명시가 유명한 애우가 愛憂歌이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愛君如愛夫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그의 죽음으로 지치주의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와 뜻을 같이 하였던 사람들은 죽거나 귀양을 가거나 산속에 숨어서 은거를 하게 된다. 17세의 양산보도 마찬가지였다. 스승인 조광조가 갑작스럽게 사사 당하였으니 그 충격이 엄청나게 컸으리라. 그는 나이 18세(1520년)에 이런 세상에서 벼슬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향인 창평으로 내려온다. 귀거래를 하면서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묻혀 살며 처사 處士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창암촌의 산기슭에 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별당을 지어 원림을 조성하는 데에 온 힘을 쏟는다.
소쇄원은 그가 창평에 내려와서 단번에 만든 원림이 아니다. 그는 30대 초반인 1530년경부터 시작하여 초정을 짓고, 나무를 심고 화초를 가꾸고 담을 쌓고 집들을 짓고 하여 40대 후반인 1548년에야 마무리를 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알 수 있는 것이 면앙정 송순과 하서 김인후의 시이다. 그리고 이 소쇄원 조영에는 이 송순과 김인후의 도움이 많았다.)
우선에 나는 왜 양산보가 이곳을 소쇄원이라고 이름 지었는지가 궁금하였다. 소쇄 瀟灑란 한자는 읽기도, 뜻을 알기도 힘든 단어이다. 소쇄瀟灑! 이 말은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인데 그 출처가 중국 제나라의 문인 공치규(447-501 자는 덕장)가 쓴 <북산이문 北山移文>이다. 여기에 소쇄출진지상(瀟灑出塵之想 : 맑고도 깨끗하며 세속을 뛰어넘는 고결한 사상)이란 말이 나온다. 이 <북산이문>은 종산에 은거하다가 혜염 현령으로 조정에 출사한 주옹 周翁이 임기를 마치고 다시 종산으로 은거하려 하자, 평소에 주옹의 출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공치규가 신령의 말을 빌려 주옹이 다시 이 산으로 은거하지 못하게 한 경고문이다.
소쇄원 안으로 들어오니 8월이라 그런지 날씨가 너무 덥다. 더구나 사람들도 많아서 원림은 한가롭지가 않다. 그래도 소쇄원의 여름은 싱싱하다. 혼자서만 갈 수 있는 위교(危橋: 위태로운 다리) 건너에는 집이 두 채 있다. 입구 바로 앞에는 연못이 있고 흙 담이 있는 데 조금 멀리 초가로 지은 정자가 하나 있다.
나는 담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다. 담은 토석담이다. 흙냄새가 난다. 한참 가니 초정이 하나 보인다. 여기가 바로 대봉대(待鳳臺)이다. 대(臺)는 원래 야트막한 둔덕이나 절벽의 평지에 세우는 데 소쇄원의 경우는 계곡에 막돌로 석축을 쌓고 여기에 따로 집을 짓지 않고 초정을 지었다.
대봉 待鳳이란 손님을 봉황같이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손님이 중니을 만나러 여기에서 기다리면 주인이 그 손님을 봉황처럼 모신다는 의미로 이 정자의 이름이 대봉대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리는 대’라는 뜻도 된다. 봉황은 나라가 태평한 세월에만 나타나는 상상속의 새이며 성군의 의미도 있다. 임금 다운 임금, 성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 소쇄옹이 왜 하필 이 정자 이름을 봉황을 기다리는 대라고 했을까. 이는 소쇄옹의 생애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쇄옹은 젊을 적에 정암 조광조에게서 학문을 배우며 개혁 정치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물이다. 하지만 스승의 뜻은 기득권 세력의 반대와 누명에 당시 왕이었던 중종의 아둔함으로 좌절이 되었고, 자기 자신은 고향에 귀거래 하게 되었던 것이다. 군주가 조금이라도 현명하였다면 그의 스승이 사사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더욱 왕 다운 왕이 나길 염원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런 염원이 초정이름을 ‘대봉대’라고 지었을 것이다. 대봉대는 단지 초가의 정자만으로 완결 된 것은 아니다. 대봉대의 맞은편에는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고 대밭이 조성되어 있다.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봉황은 오로지 대나무 열매인 죽실만 먹기에 이렇게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다. 봉황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이 초정은 1985년에 복원되었다. 원래 이 초정은 소쇄원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시가 바로 면앙정 송순(1493-1582)의 시이다. 양산보와 이종 간(송순의 고모가 양산보의 어머니임)인 면앙정 송순이 1534년에 지은 ‘외제 양언진 소쇄정 4수 가정 갑오’시에는 초정 이야기가 나온다.
작은 집 영롱하게 지어져 있어
앉아보니 숨어살 마음이 생긴다.
연못의 물고기는 대나무 그늘에서 노닐고
오동나무 밑으로는 폭포가 쏟아지네.
사랑스런 돌길을 바삐 돌아 걸으며
가련한 매화 보고 나도 몰래 한숨 지어
숨어 사는 깊은 뜻을 알고 싶어서
날지 않는 새집을 들여다보네.
그 후에 하서 김인후(1510-1560)가 초정에 관한 시를 1538년에 쓴다.
대숲 너머 부는 바람 귀를 맑게 하고
시냇가 밝은 달은 가슴을 비추네.
깊은 숲은 서늘한 기운 보내 주는데
높은 나무는 엷은 그늘이 드리우네.
술이 익어 가볍게 취기를 띠자
시가 지어져 조용히 읊조리네.
한밤중 들려오는 처량한 소리는
피눈물 자아내는 두견새의 울음.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에 그는 양산보와 사돈간이다. 양산보의 둘째 아들 고암 양자징(1523-1594)과 그의 둘째 딸이 혼인을 맺었다. 하서는 사위인 양자징을 예뻐하였고, 사위는 하서 집에서 살면서 하서 밑에서 수학하였으며 사후에도 그와 함께 필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또한 하서는 18세부터 5년간(1528-1533 기간 중)을 고향 장성에서 화순 동복에 유배중인 신재 최산두(1483-1536 최산두는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13년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를 실현하려다 기묘사화(1519)로 화순군 동복에 유배를 와서 1533년까지 15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광조, 양팽손(梁彭孫), 기준(奇遵)과 더불어 4학사라 불리었다.)를 만나러 갈 때 마다 반드시 이곳 소쇄원을 들렀다 한다. 하서는 신재에게서 굴원의 초사를 배웠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는 하서 김인후(1510-1560)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 먼저 조선왕조 실록에 적혀 있는 김인후의 인물평을 보자.
조선왕조 실록 명종 15년 1560년 1월
전 홍문관 교리 김인후(金麟厚)가 졸(卒)하였다. 자(字)는 후지(厚之)요, 자호(自號)를 하서(河西)라고 했으며 담재(湛齋)라고도 했는데 장성(長城) 사람이다. 타고난 자품이 청수(淸粹)했다. 5∼6세 때에 문자(文字)를 이해하여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했고, 장성하여서는 시문을 지음에 청화하고 고묘(高妙)하여 당시에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술과 시를 좋아했고, 마음이 관대하여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으며 그가 뜻을 둔 바는 예의(禮義)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감히 태만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자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3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부수찬(副修撰)으로 전직(轉職)되었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을 청하여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제수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중종(中宗)과 인종(仁宗)의 국상(國喪)을 만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훼척(毁瘠)하여 을사년 겨울,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사제(私第)로 돌아가 조정의 전후 제수에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사제에 거처하면서부터는 성현(聖賢)의 학문에 전념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사색하고 강구하며 차례대로 힘써서 실천하니, 만년에는 조예(造詣)가 더욱 정밀하고 깊었다. 《가례(家禮)》에 유념하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더욱 삼갔으며, 시제(時祭)와 절사(節祀)를 당해서는 비록 앓는 중이라도 반드시 참석했고, 시속의 금기(禁忌)에 흔들리지 않았다. 자제를 가르칠 적에는 효제·충신을 먼저하고 문예(文藝)를 뒤에 했으며, 남과 대화를 나눌 때는 자기 의사를 표준으로 삼지 않았으나 한번 스스로 정립(定立)한 것은 매우 확고하여 뽑아낼 수 없었고 탁월해서 따를 수가 없었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썼고 필적은 기굴(奇崛)했다. 51세에 졸했다. 《하서집(河西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하서 김인후 (1510-1560).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난 그는 호남 성리학의 선구자이다. 5살이 되던 정월 보름날에 다음 5언4구 한시를 써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글 재주가 뛰어 났다.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요
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때라
사람들 말이야 무슨 험 되랴
밝은 달은 본디 사가 없도다.
高低隨地勢 早晩自天時
人言何足恤 明月本無私
10세 때 전라관찰사로 내려온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으며 송순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22살(1531)에 성균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황(1501-1570)과 교유가 두터웠다. 31살인 1540년(중종 35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다음해에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의 영광을 누렸다. 1543년에 홍문관 박사를 거쳐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으며 홍문관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543년 겨울부터 옥과현감으로 있었는데 그의 나이 36세인 1545년 7월에 인종이 죽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대고 옥과현감 자리를 사직하고 귀향하여 평생 초야에 묻히었다.
그는 해마다 인종의 기일인 7월1일에는 술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한 잔 마시고 한번 곡하다가 취하면 소리 내어 울었을 정도로 인종을 못 잊어 했다 한다. 하서는 학문과 출처를 모두를 갖춘 학자이었고 그는 1,600수에 이르는 시를 썼다. 창평과 관련이 있는 시는 소쇄원 48영과 면앙정 30영이 대표적이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 성 誠과 경 敬을 중시하였고 천문, 의학, 율력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집안은 인근 고을애서 배우러온 선비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는 송강 정철도 있었다. 그는 문묘 18현에 배향된 유일한 호남출신이고 그를 모신 서원이 장성 필암서원이다.
이런 하서는 소쇄원이 어느 정도 완성된 1548년(그의 낙향 후 3년 되는 해)에는 <소쇄원 48영> 시를 지어 소쇄원의 경치를 찬양한다. 이후로도 그는 틈이 날 때는 이곳에서 몇 달씩 머무를 정도로 소쇄원을 좋아하였다 한다.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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