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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호남 정신 25회, 일재 이항 -남고서원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5. 일재 이항, 태산가 부르며 학문 닦기를 쉬지 않네 - 정읍시 남고서원, 보림사
입력시간 : 2010. 01.07. 00:00


남고서원 강수재
나랏일 예견한 호남 성리학의 종조

강인한 체력으로 학문에 정진…하서·고봉과 교분

호남 의병장 김천일·최경회·고종후 길러낸 스승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산만 높다 하더라.



전북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 있는 남고서원을 간다. 이 서원 강당 기둥 주련에 위 오언한시가 적혀있다. 원래 이 시는 봉래 양사언(1517-1584)의 태산가로 알려져 있는데 왜 여기에 이 시가 있을까. 이 시 위에는 연꽃이 그려져 있다. 흔히 연꽃은 불교의 꽃이라고 하지만, 유학에서는 군자의 꽃이다. 송나라 성리학자 주돈이는 그의 시 애련설(愛蓮說)에서 연꽃을 군자의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나는 홀로 연꽃을 사랑한다.

진흙탕에서 나와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 , 잔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었으되 밖은 쭉 곧아 …



강수재(講修齋)라고 이름 붙여진 이 강당에서 한 유학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위 한시를 합창하도록 하였단다. 먼저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시키었다.

이 유학자가 바로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다. 호방하기도 하고 용력이 뛰어나 말 타기를 잘 하고, 활도 잘 쏘았다. 또한 난봉꾼 대장으로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그가 27세 되던 해, 큰 아버지 판서공이 그를 나무랐다. 사람 도리를 하여야지 망나니처럼 살면 되냐는 꾸지람이었다. 그때서야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사서삼경 공부를 하였다. 바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오로지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정신일도 하였다.

한 번은 서울 도봉산의 망월암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참선 수행을 하는 스님과 같이 지냈는데 너무 더운 한 여름이라서 선승이 잠깐 졸았다. 그러나 이항은 어깨와 등을 꼿꼿이 하고 자세를 하나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걸어가면서도 말을 타면서도 공부를 하였다. 항상 칼을 옆에 꽂아놓고 기를 한 곳에 모으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1539년에 이항은 선친의 땅이 있는 전라도 태인현에 어머니와 함께 내려와 살았다. 칠보산 아래 보림사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이름을 일재라고 지었다. 오로지 한 가지로 집중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일자를 도의 근본으로 삼았다. “도심(道心)은 성명(性命)에 근원하고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에서 나오는 까닭에 두 가지를 자세히 살피면 하나이니, 하나를 지키는 것이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정읍시 북면 남고서원


그는 '대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대학' 공부를 쉬지 않고 하면 문리가 트인다고 생각하고 거경궁리(居敬窮理)하였다.

일재는 두 아들 이름도 덕일(德一), 수일(守一)로 지었다. 뒤 글자에 일자를 붙였다. 두 아들 이름의 앞 글자를 합치면 덕수이다. 덕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이항은 송인수와도 친하였다. 1543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온 송인수는 맨 먼저 일재를 방문하였다. 송인수는 일재를 만나보고 장횡거가 따로 없다고 탄복하였다. 장횡거는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송나라의 사상가 장재(1020-1077)를 말한다.

20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복직된 태인 현감 신잠(1491-1554)도 일재를 자주 찾았다. 신잠은 그를 존경하여 마지않아 강당을 크게 지어주었다. 송인수와 신잠이 일재를 뵈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전국에서 많은 선비들이 그를 찾아왔다. 이 마을에 갓시장이 섰다. 선비들이 의관을 갖추고 이항을 뵈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갓은 한자로 입(笠) 또는 관(冠)이다.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이 입점 또는 관동(冠洞)이 되었다.

일재는 하서 김인후(1510-1560)와도 잘 어울렸다. 하서는 가끔 일재를 찾아갔다. 일재는 하서가 찾아오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하서와 같이 술을 마시었다. 일재가 하서에게 시를 읊었다.



쓸쓸하고 고요한 밤 산 속의 집에

벗이 멀리서 찾아 왔구나.

그대가 도를 전하려 한다면

내 술잔으로 같이 취해보세나.



하서도 흔쾌히 화답하였다.



공경으로 서면 사특함이 사라지고

참을 알면 이치가 거기 있더이다.

책 한질로 마음 보존하고

석잔 술로 기운 기르니 참 좋구나.



이렇게 죽이 맞은 두 사람은 서로 사돈을 맺었다. 하서의 큰 아들과 일재의 딸이 결혼을 한 것이다.

그런데 1560년에 하서가 별세한다. 일재는 슬픔에 젖어 아래 만시를 짓는다.



바로 높은 경지에 들어감은 선비가 바라는 바인데

궁구하고 다 생각하여 정밀함과 은미함을 극진히 탐구했네.

홀로 쓸쓸히 천년동안 끊어진 실마리를 찾았으니

비록 세상 떠났다 하나, 도가 저절로 빛나네.




일재는 고봉 기대승(1527-1572)과도 만났다. 1558년 7월, 기대승은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면서 장성에 있는 하서를 뵙고 나서 태인현에 들러 일재를 뵈었다. 날이 어둑해 질 무렵 보림사 근처에서 고봉은 농사일을 마무리 하고 있는 늙은이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일재 선생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 노인은 바로 자기가 일재라고 하면서 고봉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갔다. 이때 일재는 60세, 고봉은 32살이었다. 두 사람은 밤을 세워 성리학의 주요 논제에 대하여 대화하였다. 그런데 대화가 태극의 이론에 이르자 두 사람은 견해가 달랐다. 일재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지 정밀함과 거침, 근본과 말단에 있어 구분이 없다’는 입장이었고, 고봉은 ‘태극은 음양이 섞이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그 해 겨울에 고봉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이항을 만나 논쟁을 하였으나 견해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 뒤에 고봉은 하서를 찾아뵙고 하서에게 태극의 이론을 물었는데 하서의 뜻은 고봉과 같았다. 즉 ‘도와 그것을 담은 그릇의 구분에는 경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태극과 음양은 하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또 다시 고봉은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태극논쟁에 관하여 일재와 하서 간에 오고 간 편지 사본을 첨부하여 그 견해를 물었다. 이에 대하여 퇴계는 호남의 유학자들이 주자학 논의를 하는 것에 대하여 깊이 감탄하고 흠모하였다.

일재는 노수신과도 성리학 논쟁을 하였다. 당시 노수신은 1547년에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인하여 진도에서 유배 중이었다. 일재는 누구에게나 이와 기, 태극과 음양은 일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566년(명종 12년)에 명종은 이조, 예조에 명하여 산림에 지내면서 경명행수(經明行修)로 고명한 학자를 천거하였다. 이에 천거된 여섯 인물 중 한사람이 바로 일재였다. 이 때 성운, 남언경등도 같이 천거되었다. 일재는 임천군수를 지냈다. 선조 때는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일재가 병이 악화되자 선조는 네 번이나 어의를 보내어 문병하였다.

정읍시 북면 칠보산 밑 보림사에는 일재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을 표시한 강마 (講磨) 바위가 있다. 일재의 제자들은 김천일, 변사정, 김제민, 김점, 소산복, 백광홍, 최경회, 황진, 고종후 등이다. 이 중에서 백광홍(1522-1556)은 장흥 사람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가사 '관서별곡'을 지은 사람이다. 그런데 백광홍은 일재보다 먼저 죽어 일재는 백광홍의 재주를 매우 아까워하였다 한다.

한번은 남쪽 지방에 왜구가 출몰한다는 나쁜 소식이 들리었다. 일재는 국난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준비를 단단히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육도삼략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공부하고 있던 김천일, 김제민, 변사정 등과 같이 극기 훈련을 하였다. 5일씩이나 밥을 먹지 않고 견디는 훈련을 한 것이다. 이 극기 훈련에 일재와 김천일은 무난히 견디었으나 나머지 제자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황진, 변사정, 김제민등 일재의 제자들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관군 또는 의병이 되었다. 특히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는 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싸우다가 순절한 호남의 의병장이다. 이항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거의 죽었기 때문에 일재의 학문이 후대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은 너무 아쉽다.

퇴계가 호남 성리학의 종조라고 말한 일재 이항. 그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을 실천한 유학자였다. 힘써 공부하기를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도학자였다. 그리고 나랏일이 어찌 될지를 미리 예견하고 준비한 실천가였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1부를 마치면서 - 義의 길을 가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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