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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호걸중의 호걸, 금호 임형수 - 나주 송재사 ,광주 등임사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17.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금호 임형수 - 나주 송재사, 광주 등임사
입력시간 : 2009. 11.05. 00:00


나주 송재사
문무를 겸비한 호걸 중의 호걸

활쏘기와 시문에 능해 명나라까지 회자


벽서사건 연루돼 33세에 안타까운 죽음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落落長松) 아니런가

져근덧 두던들 동량재(棟樑材)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남기 바티리.

대들보가 될 만한 나무를 베어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이 시조는 하서 김인후가 지은 시조이다. 그리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금호 임형수(1514-1547)에 대한 만시이기도 하다. 하서와 금호는 호당에서 같이 공부한 사이이고 고향도 장성과 나주로 서로 이웃이었다.

임형수(林亨秀). 그의 자는 사수(士遂) , 호는 금호(錦湖)로서 나주에서 태어나서 1535년 그의 나이 21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시강원 설서,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대제학 소세양이 원접사로 명나라 사신을 모실 때 그는 종사관으로 갔는데 시문에 능하여 명나라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그는 풍채가 좋고 문장도 뛰어나며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하여 사람들이 나라의 그릇이라 칭송하였다.

1539년 7월, 임형수는 회령판관으로 나가게 된다. 회령은 함경도 두만강 변으로서 여진족과 접하고 있는 변경이다. 당시 북쪽지방은 연이은 기근과 일부 수령들의 횡포가 커서 백성들을 진정시키기에 적당한 인재가 필요했던 바, 중종임금은 임형수를 지목하였다.

그런데 금호를 회령판관으로 보내는 것에 대하여 여러 중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금호에 대한 중종의 신임은 한결 같았다. “이 사람은 문무가 뛰어나니 내가 변방에 보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금호가 부임지로 떠나던 날, 많은 조정대신들이 흥인문 밖에 나와 전송하였다. 송순의 '면앙집'에도 ‘회령판관으로 떠나는 임형수를 보내며’ 란 시가 전하여 진다.

그는 회령에 가서는 호방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그는 때로는 2일 분을 한꺼번에 먹기도 하고, 혹은 하루에 여러 사람의 밥을 겸하여 먹기도 하며 말하기를, ‘장수된 자는 이러한 습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하였다. 변경의 되놈을 어루만져 편하게 해 주어서 심복하였다.' -'해동잡록'에서

이 시절에 금호는 수항정(受降亭 항복을 받는 정자라는 의미) 시를 지었는데 허균의 '국조시산'에 실려 있다.

취하여 호상(胡床)에 기대어 물소뿔 술잔을 드는데

미인이 옆에 앉아 정답게 아쟁을 타네.

모랫벌에서 싸움 마치고 느지막히 돌아올 때

말 달려 얼어붙은 강에 이르니 칼과 창이 우는 구나.

허균은 이 시의 말미에 ‘호탕함이 지극하고 의협의 기질이 나부끼는 듯하다’고 평하고 있다.
광주 광산구 등림사


1545년 7월에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부제학 임형수는 제주목사로 좌천된다. 실세인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보복을 한 것이다. 임형수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다툼이 있었을 때 그의 아우에게 ‘만약 한 두 사람만 곤장을 친다면 곧 진정시킬 수 있다’ 하였는데 이는 윤원형의 형 윤원로를 가리킨 말이었다. 그런데 금호의 아우가 이 말을 친한 사람에게 이야기하여 사방에 소문이 났다.

그 당시에 임형수는 승하한 인종 임금의 산릉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종에게 만시를 쓴다.

하늘이 사문(斯文 유학자)을 없애고자 하니

신이 어찌하여 이런 때를 만났을까

오늘의 눈물을 가지고

작년의 수건을 거듭 적십니다.

평생의 뜻을 본받아 보은을 갚고자 하나

울부짖되 죽지 못한 몸입니다.

산릉의 준공을 보지 못한 채

남쪽 나라로 자리 옮김을 진실로 슬퍼합니다.

한편 윤원형은 제주목사로 발령 난 임형수의 마음을 떠 보려고 송별연을 마련했다. 병 주고 약주고 이었다. "자 어서 드시지요. 부제학." 두주불사의 주량인 임형수는 윤원형을 말끔히 노려보다가 한 마디 하였다. "공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주량대로 마시리다."

겁에 질린 윤원형은 그 자리를 떴고 이 후 윤원형은 임형수를 제거하려고 마음먹는다.

1547년 9월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졌다. 임형수는 윤임과 가까운 사람으로 지목되어 제주목사직에서 파직된다. 며칠 후 벽서사건 고발자인 부제학 정언각이 다시 상소한다. 임형수를 너무 가볍게 처벌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금호는 사약을 받는다.

1547년 9월21일 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임형수의 사약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임형수는 그때 파직되어 집에 있었는데, 죽을 적에 부모에게 절하고 그 아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 하고, 다시 말하기를, ‘무과일 경우는 응시해도 좋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 하였는데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마시려고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하였다.

'유분록'에는 금호가 사약을 열여섯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까딱도 하지 아니하자 다시 두 사발을 더 마시게 했는데도 죽지 않아, 목을 졸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형수는 시문에도 뛰어 났다. 1537년에 중종이 서쪽 교외에 행차하여 농사일을 시찰하고 망원정에서 시 한 편을 짓게 했는데, 병조판서 소세양이 1위를, 임형수가 2위를 하여 사서삼경과 말 1필을 하사 받을 정도로 문예가 뛰어났다. 그의 시는 허균의 '학산초담'이나 '성수시화'에 실릴 정도로 걸작이었다. 허균은 금호의 호방한 시를 칭찬하면서 그가 원통하게 일찍 죽은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임형수는 풍류가 호일하고 그 시 또한 펄펄 나는 듯하였다.

고개 숙인 꽃은 술에 취한 미인의 얼굴이요.

끊어진 산은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로다.

이 시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퇴계 선생이 그를 몹시 사랑하여 만년까지도 문득 생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면 임사수와 더불어 서로 대면할 수 있으랴." -'성수시화'에서

윤근수는 '월정만필'에서 임형수의 호방함과 퇴계와의 관계를 이렇게 적고 있다.

금호는 너무 일찍 과거에 올라 갑작스럽게 화려한 벼슬을 지냈다. 성격이 호방하여 얽매임이 없었으므로 호기를 부려 사람들을 만만하게 보아 아무리 선배이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거만한 말로 대하였는데, 다만 이황만은 존경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다.

일찍이 신잠이 그린 대나무 그림에 금호가 쓴 시가 이렇다.

영천(靈川)의 붓으로 그린 푸른 대나무 그림에는

소상강 어귀의 높은 지조가 눈과 달빛 속에 차구나

시인을 골라 보면 누가 이와 비슷할까

맑고 수척한 모습, 마땅히 퇴계와 함께 보리라.

이렇듯 퇴계를 존경하는 태도가 극진하였다.

금호는 죽어서도 일화를 남기고 있다. 먼저 '해동잡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지사 강섬(姜暹)이 명나라 서울을 가다가 명나라에 공문을 바치러 가는 되놈을 만났는데 거의가 우리나라와 가까이 지내는 자들이었다. 우리 통역에게 물어 보기를, “너의 나라에 임형수란 이는 지금 잘 있느냐?” 하니,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되놈들은, “임형수란 분은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너의 나라에서 이 사람을 죽였다기에 그 사실 여부를 물어본 것이다” 하니, 통역은 대답하지 못하고 말았다.

야담집 '기문총화'에는 주인의 원수를 갚은 말 이야기가 있다.

임형수를 모함하여 죽게 한 정언각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한 쪽 다리가 등자에 걸렸는데 말이 마구 날 뛰면서 걷어차서 크게 다치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통쾌해하고 하늘이 아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가 탔던 말이 바로 임형수가 항상 타고 다니던 말이었다.

나주시 문평면 송재사와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림사에는 그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나이 33세에 희생당한 동량재 금호 임형수. 그는 정녕 문무를 겸비한 호걸 중에 호걸이었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천지신명은 내 마음을 알리다, 규암 송인수 - 장성 기영정, 진도 벽파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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