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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미암 유희춘, 유배중에도 학문에 정진하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16. 미암 유희춘, 유배 중 학문에 정진하다 - 담양 연계정·모현관, 광주 무양서원, 해남 해촌서원
입력시간 : 2009. 10.29. 00:00


암기력 돋보이고 경연에 특출했던 선비

벽서사건으로 유배의 길…선조 때 복권돼 중용

변방에
모현관
서도 학문에 정진…보물 '미암일기' 집필

종성은 천하의 궁벽한 곳

티끌 모래 날로 일어 자욱만 하네.

사투리를 잃지 않은 십년 나그네.

부질없이 고향 꿈만 꾸고 있다네.

북쪽 변방 아무도 물어오는 사람 없는데

하서 혼자 나를 생각하며

삼 백 자나 되는 시를 새로 적어 보내

털끝만큼 어긋나다 크게 그르쳤음을 말해주네.

두만강 끝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중인 한 선비가 전라도 장성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장성 친구가 보낸 안부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아름다운 아미암 같은 사람

어찌 이리도 생각나게 하는 가

언제 함께 평상에 앉아

책 펴고 조금씩 갈라 밝힐 수 있을 지

이 편지들의 주인공은 하서 김인후(1510-1560)와 미암 유희춘(1513-1577)이다. 미암은 종성에서 유배중이고 하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장성에서 살고 있다.

1545년 인종이 승하하고 11살의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밀지를 내린다. 윤임, 유관, 유인숙등 대윤 일파를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이 밀지를 받은 대신들은 모여서 상의를 한다. 유희춘, 백인걸 등은 그 자리에서 부당함을 지적한다. 죄목이 분명하지 않고 밀지에 의해 처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문정왕후는 크게 노한다. 곧바로 유희춘 등은 파직을 당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47년 9월에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척신 계열인 부제학 정언각이 봉투에 든 글 한 장을 문정왕후에게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 딸이 남편의 임지를 따라 전라도를 가기에 전송하려고 과천현의 양재역에 갔다가 익명의 벽서를 보았습니다. 이에 봉하여 올립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윤원형 일파는 이 벽서사건을 이용하여 윤임의 잔당세력과 정적들을 일제히 제거한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 윤원형을 탄핵한 송인수, 그리고 이약빙을 사사(賜死)시키고 ,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임형수, 백인걸, 정유침(정철의 부친), 권벌 등 수십 명을 귀양 보낸다.

그리하여 노수신은 진도로 유희춘은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그런데 유희춘은 유배지가 함경도 종성으로 다시 바뀐다. 제주도가 고향인 해남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였다.

미암 유희춘. 그는 해남에서 태어났다. 미암(眉庵)이란 호도 해남읍 금강산에 있는 초승달 같고 미인 눈썹처럼 생긴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버지 유계린은 최부의 사위인데, 순천에서 유배중인 김굉필에게 공부를 배웠다.

최부와 김굉필은 둘 다 갑자사화로 처형된 사림이고, 미암의 형 유성춘도 기묘사화로 화를 당하였다. 미암도 대를 이어 사화의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미암은 15세 때 하서와 같이 동복현에서 유배중인 최산두에게 공부를 배웠다. 그리고 하서보다 먼저 관직에 등용되어 하서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그는 성균관 관원이었다.

그때 하서는 전염병에 걸려 위독했는데 사람들이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미암은 하서를 밤낮으로 간호하여 다시 살려냈다.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이 일화를 전하고 있다.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가는 도중에 미암은 하서를 만난다. 하서는 미암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실낱같은 재회를 기약한다.

술에 취해 꺾었다오. 버들가지 하나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는 데, 한없는 이 정을 어이하리.

만리라. 내일이면 머나먼 길을 떠난다지.

저 달이 몇 번이야 밝아야 그대 돌아오려나.

그리고 하서는 ‘자네가 멀리 귀양을 가고 처자가 의지할 데가 없으니 자네의 아들을 나의 사위로 삼겠노라’고 한다. 그 당시 미암의 외아들은 벼슬이 없었다. 하서 집안에서 반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서는 셋째 딸을 미암의 외아들에게 시집보낸다. 미암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삭풍이 몰아치는 외진 땅 종성에서도 미암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육진이 있는 변방은 되놈으로 불리는 말갈족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백성들은 말 타고 활 쏘는 무인 기질이 농후하였고 학문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는 종성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지겨워하는 백성들도 차츰 그를 따라 공부를 배웠다.

그는 총명이 뛰어나서 읽은 책치고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중에도 속몽구 (續蒙求) 4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암송하고 있는 것을 토대로 하여 만든 것이다.

1565년에 문정왕후가 별세하고 윤원형이 축출 당하자 양재역 벽서 사건은 소윤이 꾸민 공작정치로 밝혀지고 유배 갔던 사림들은 다시 등용 된다. 그러나 유희춘은 그러하지 못했다. 충청도 은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지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1567년에 선조 임금이 즉위하자 세상은 달라졌다. 사림들이 중용되었고 사화로 피해를 입은 선비들이 다시 복직되었다.

1567년 10월 선조는 유희춘, 노수신의 복직을 명한다. 20년 만의 관직이었다. 그래도 품계는 예전 그대로였다. 기대승이 나섰다. “20년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을 폐하지 않고 곤궁과 환난 중에도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순서를 따르지 않고 발탁하여 기용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미암사당


1568년 1월 드디어 선조는 기대승의 건의를 받아 들여 유희춘, 노수신을 특진시킨다.

미나리 한 펄기를 캐어서 씻우이다.

년대 아니아 우리 님께 바자오이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다른 데 아니라 우리 님에게 바치옵나이다. 맛이야 좋지 않습니다마는 다시 씹어 보소서.

이 시조는 1571년 유희춘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왕명을 받고 내려온 박순과 함께 전주 진안루에서 노닐 때 지은 헌근가이다. '여씨 춘추'의 ‘벼슬에 있지 않는 이가 살진 미나리를 캐어서 임금께 바치고 싶다‘는 구절에 착안하여 살뜰한 연군의 정을 표현하였다. 하기야 미암 입장에서는 선조 임금에게 무엇이든 못 바치랴. 그를 등용하여 특별 승진 시켜준 이가 선조 아니던가.

유희춘은 선조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특히 경연에서는 특출하였다. 경전은 모르는 것이 없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총명한 암기력은 그를 돋보이게 하였다. 그는 책도 많이 만들었는데 국조유선록과 헌근록이 대표작이다. 국조유선록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등 네 분 명현의 저술과 언행, 행장을 엮은 책이고, 헌근록은 역대 선현들이 임금에게 제시한 임금의 길을 편찬한 책이다.

한편 19년의 유배기간동안 집안일을 도맡아 한 사람은 부인 송덕봉이었다. 그녀는 담양 출신으로 친척인 면앙 송순의 중매로 유희춘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유배기간 동안 노모를 모시고 집안을 이끌며 3천리나 되는 종성 유배지를 찾아다니는 여장부였다. 그리고 여류시인이었다.

가고 가서 마천령에 이르니

동해 바다 끝이 없더니 종성이 나오더라.

여인네가 만리를 어인 일로 왔는가.

삼종(三從)의 의리는 중하고 내 몸은 가벼운 것을
연계정


이 시는 언제인가 송덕봉이 마천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인데 '대동기문'에 전하여 진다.

유희춘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암일기'이다. 유희춘은 다시 벼슬한 1567년 10월부터 죽기 전인 1577년 5월까지의 11년간의 기록을 자세하게 일기로 남긴다. 미암일기는 16세기 조선 시대의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으로서 보물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희춘의 신위는 외할아버지 최부와 함께 해남 해촌서원과 광주 무양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또한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는 미암이 노후에 지낸 연계정과 미암일기를 보관한 모현관이 있다. 미암과 부인 송덕봉을 모신 사당도 후손이 사는 집 뒤에 있다. 그리고 모현관 옆에는 미암 유물 전시관 공사가 한창이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금호 임형수 - 나주 송재사, 광주 등임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