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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하서 김인후, 인종 임금을 그리워 하다. - 장성 필암서원 맥동마을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4. 하서 김인후, 인종 임금을 그리워하다 - 장성 맥동마을, 필암서원
입력시간 : 2009. 10.15. 00:00


기묘사림 복권 주장한 인종의 스승

문묘 배향 18인 유학자 중 유일한 호남선비

내년 탄생 500주년 맞아 재조명 작업 기대

'래 소인(小人)으로서 죽어도 죄가 남을 자는 다 복직되고,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나라를 속이지 않은 자는 상은(上恩)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상은을 입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이 숭상하던 글도 모두 폐기하고 쓰지 않으니, 매우 온편하지 못합니다.'

1543년 7월 20일 부수찬(종6품) 김인후는 경연에서 중종임금에게 기묘사림들의 복권 문제를 거론한다.

그날 중종 임금은 승지 홍섬에게 다시 묻는다.

승지 홍섬(洪暹)에게 전교하기를, “김인후가 아뢴 전말을 잘 듣지 못하였는데, 과연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하니, 홍섬이 답하였다. “신도 미처 잘 듣지 못하였으므로 사관(史官)에게 물으니, 본심이 나라를 속이지 않았다는 것은 기묘년 사람(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 등)을 가리킨 것이라 합니다.”

김인후는 7월 22일 경연에서 이틀 전에 한 이야기를 중종 임금에게 다시 자세하게 아뢰었다.

“전에 조강(朝講)에서 신의 말소리가 작아서 분명히 아뢰지 못하였으므로 지극히 황공합니다. 기묘년 사람은 한때 한 일이 죄다 옳지는 못하나,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인 것이 없는데도 마침내 무거운 죄를 입었습니다. 그 뒤에 죄 지은 사람 중에는 대역부도(大逆不道)하여 죽어도 죄가 남을 자라도 세월이 오래되어 혹 복직(復職)된 자가 있는데, 기묘년 사람은 오히려 상은(上恩)을 입지 못하니, 신은 홀로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이 아니라, 그들이 한때 숭상하던 '소학', '향약(鄕約)'의 글도 모두 폐기하고 쓰지 않습니다.” (중략)

임금이 이르기를, “저들이 마음을 쓴 것이 그르지 않다 할지라도 장차 나라를 그르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조정이 그 폐단을 바로 잡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소학', '향약'을 사람 때문에 폐기할 수는 없다”하였다. (후략)

이 날 경연에서 이언적도 나서서 기묘사림의 복권을 주장하며 김인후를 도왔으나 중종 임금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 직급도 낮은 신하가 자기가 내친 조광조 등을 다시 복권하라 건의하니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임금으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었으리라.

이 일이 있은 후 1543년 12월에 김인후는 노부모 봉양을 이유로 전라도 옥과현감으로 내려온다.

하서 김인후(1510-1560). 호남 성리학의 선구자인 그는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정월 보름날에 아래 한시를 써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 났다.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요

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때라

사람들 말이야 무슨 험 되랴

밝은 달은 본래 사심이 없도다.



高低隨地勢 早晩自天時

人言何足恤 明月本無私



그는 전라감사로 부임한 조광조의 삼촌인 조원기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고, 8세 때 봄에는 고봉 기대승의 삼촌인 기준을 만나 임금의 붓을 선물로 받기도 하였다. 10세 때 전라감사인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으며, 박상과 최산두, 그리고 송순에게도 글을 배웠다. 김인후는 소쇄원 주인이고 조광조의 문인인 양산보와도 친구이자 사돈이었다.

22살(1531년)에 성균관에 입학한 그는 퇴계 이황과 교분이 두터웠고, 1540년(중종 35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다음해에 호당에 뽑혀 이황, 나세찬, 임형수 등과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일)의 영광을 누렸다.

하서 김인후는 일찍이 시강원 설서(정7품)가 되어 인종(1515-1545)을 가르치던 스승이었다. 세자 시절 인종은 하서를 극진히 사랑하여 묵죽도를 그려주고 새로 간행된 '주자대전'을 주었으며 술도 같이 마시었다. 인종이 그린 묵죽도는 지금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묵죽도에는 다음과 같은 하서의 시가 적혀 있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이리 정미(精微) 하니

바위를 친구 삼은 정갈한 뜻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비로소 성스런 혼이 조화를 기다리심을 보았나이다.

온 천지가 어찌 어김이 있겠습니까.



根枝節葉盡精微 근지절엽진정미

石友精神在範圍 석우정신재범위

視覺聖神俟造化 시각성신사조화

一團天地不能違 일단천지불능위



1544년 11월에 중종임금이 승하하고 인종임금이 즉위하였다. 김인후는 인종을 곁에서 모시면서 지키고자 하였다. 그는 문정왕후가 임금의 약 처방까지 한다는 데 불안 해 하였다. 또한 임금과 한 궁궐에 있는 것도 미심쩍었다. 그래서 자신이 의원의 처방에 동참하겠다고 하고 임금의 거처를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효종임금은 ‘역(逆)이지만 충(忠)이다’ 라고 하였다. 비록 계모이지만 어마마마인 문정왕후를 의심한 것은 역적질에 해당되지만 임금을 위하여 한 행동은 충절이라는 의미이다.

1545년 7월1일 인종임금은 재위 8개월 만에 승하 한다. 생모 장경왕후를 일주일 만에 여윈 비운의 왕은 서른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준 떡을 먹고 죽었다고 적혀있다. 일종의 독살설이다.

다행히 인종은 죽기 이틀 전 인 6월29일에 조광조, 김식, 김정, 기준 등을 복권하고 현량과를 다시 설치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명종이 즉위하자 하서 김인후는 옥과현감을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36세의 나이에 아예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 이후 명종이 벼슬을 여러 번 하사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명종이후의 관작은 기재하지 말라고 유언까지 한다.

하서는 인종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가 쓴 ‘그리운 사람(有所思)’이란 시를 읽어보자.



임의 나이는 서른이 되어 가고

내 나이는 서른여섯이 되는데

새 즐거움 반도 못 누렸건만

한 번의 이별은 활줄 떠난 활 같네.



내 마음 돌이라서 굴러갈 수도 없는데.

세상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 같아.

한창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마저 희었네.



묻혀 살면서 봄가을이 몇 번이던가.

오늘까지 아직도 죽지 못했소.

(후략)



하서는 인종의 기일인 매년 칠월이면 장성 백화정 집 앞의 난산에 가서 종일토록 통곡하였다. 제자인 송강 정철이 그 모습을 시로 남기었는데 그 편액이 필암서원에 있다.



동방에는 출처 잘 한 이 없더니

홀로 담재옹(하서의 다른 호)만 그러하였네.

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 되면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年年七月日 痛哭萬山中



김인후는 문묘에 배향된 정몽주, 조광조 18명의 유학자 가운데 유일한 호남의 선비이다. 장성군 필암서원과 황룡면 맥동마을에는 그에 대한 흔적이 많다. 백화정, 난산, 어사리(인종이 하사한 배의 씨가 자란 배나무), 그리고 묘소에는 도학과 절의와 문장 이야기가 진하게 남아 있다. 내년이 그의 탄생 500년이 되는 해이다. 청수부용(淸水芙蓉)의 선비 김인후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석천 임억령, 녹권을 불사르고 동생과 인연을 끊다 - 해남 해촌서원, 담양 식영정, 화순 도원서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