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천지신명은 내 마음을 알리다, 규암 송인수 - 진도 벽파정, 장성 기영정
외로운 충성은 달처럼 밝고 가벼워
노 끝에서 가라앉았다 떴다 하는구나.
해는 지고 멀리 모래밭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신 임의 혼을 부르며 몹시도 그리워하네.
孤忠輕性明 고충경성명
端棹任沈浮 단도임침부
日落芳洲遠 일락방주원
招魂意轉悠 초혼의전유
벽파를 건너며 읊다.
김정
우주는 예로부터 심원하나
인생은 원래부터 떠다니는 삶이라네.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이제 떠나면
고개를 돌려 보아도 아주 아득하겠지.
전라감사 송인수(宋麟壽 1499-1547)는 진도 벽파정에 걸린 기묘명현 충암 김정 (1486-1521)의 시를 읽고서 비감 悲感에 젖는다. 바른 정치를 하고자 하는 뜻을 못 이루고 죽은 김정을 애도하면서 차운시를 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또한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사약을 받는다.
규암 송인수. 그는 청주 출신으로 강직하고 학문에 열심이고 청렴한 선비였다. 15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1525년 박사 · 수찬을 거쳐 정언 · 부응교를 지냈다. 1533년 김안로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자, 송인수는 장령 掌令으로서 김안로를 강력히 탄핵하였기에 배척을 당하여 제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그는 제주에서 수토병 水土病에 걸려 사임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김안로의 파당들이 죄를 얽어서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사천 泗川으로 유배를 보냈다.
1537년 김안로가 몰락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예조참의 겸 성균관대사성으로 후학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했다.
1543년 2월에 송인수는 전라도관찰사가 된다. 그는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고, 소학을 장려하고 〈사서삼경〉을 간행하는 등 유학을 진흥시켜 인재 양성을 급선무로 삼았다. 이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관찰사가 너무 급하게 서둔다고 충고하였다. 규암은 옛적에 송의 유학자 정호 程顥가 주장한, ‘근본 문제부터 착수해야 된다.’는 것과 장재 張載가 말한, ‘남의 비난과 비웃음을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것들을 인용하여 대답하기를, “옳다고 생각하면 단연코 실천해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 산림에 묻혀 있는 학자들을 찾아가서 예우를 하고, 함께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1544년 3월 송인수는 중종의 어명을 받들어 원로대신 송흠을 위하여 기영정 耆英亭 정자를 짓고 잔치를 베풀었다.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노인 중에서 가장 빼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라는 의미의 기영정은 송흠이 지은 정자 관수정 바로 앞에 있다.
한편 송인수는 전라관찰사로 있으면서 무장현감 유희춘, 남평현감 백인걸과 마음이 맞아서 자주 어울렸다. 그는 부안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그녀와 정을 통하지는 않고 다만 데리고 다닐 뿐이었다. 송인수가 조정으로 발령이 나자 두 현감과 그 기생이 여산역 礪山驛에서 전송을 하게 되었다. 허균의 <성옹지소록>에 전해지는 일화를 읽어보자.
“내가 이 기생이 영리한 것을 사랑하여 1년 동안이나 한 자리에서 지내면서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죽을까 염려 되어서였네.”라고 규암이 말하자, 기생은 곧 앞산에 있는 많은 무덤을 가리키면서, “과연 그렇습니다. 저기 보이는 여러 무덤들이 다 나의 서방이었습니다.”하였다. 이는 공을 원망해서 한 말이었으므로 모두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뒤에 그 기생은 늘 공을 칭찬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1544년 9월 그는 형조참판으로 다시 조정에서 근무하였다. 이어서 동지사가 되어 중국 북경에 갔다. 그를 따라간 사람들은 물건을 사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규암의 숙소는 쓸쓸하고 사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중국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한 조각의 얼음과 옥’이라 했다. 청렴하기가 빙옥 氷玉 같았다.
1544년 11월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은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을 발탁하여 공조 참판을 시켰다. 이는 계비인 문정왕후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대사헌 송인수는 보름이 넘도록 윤원형을 탄핵하여 결국 가선대부의 직위를 빼앗아버렸다.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고 근심하며 그 탄핵을 멈추고자 하나, 규암은 듣지 않았다. 송인수의 매부 성제원이 나섰다. 송인수는 성세원을 존경하여 그가 말하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성제원은 송인수와 같이 잠을 자면서 너무 고집 피울 필요가 없다는 뜻을 넌지시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규암은 거짓으로 자는 체하고 응답조차 아니 하였다. 송인수는 평소에 자기 마음을 비우고 남의 말을 잘 받아들였는데, 이 일에는 황소고집이었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한성부좌윤에서 파직당하고, 청주 시골로 돌아갔다. 퇴계 이황이 규암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규암이여, 옛날 풍진에 묻혀 있을 적에도
소쇄함이 세속 사람 같지 않더니
이제 청주로 돌아가 농사짓기를 배운다 하니
청주에 풍년 들어 고야산(<장자>에 나오는 선경 仙境)처럼 풍성하리라
1547년 9월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송인수에게 사약이 내려 졌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 기술>에는 송인수의 사약 받은 장면이 이렇게 적혀 있다.
그가 사약 받은 날은 마침 공의 생일이었으므로 일가친척과 제자들이 많이 모였다. 이날 집안사람들은 조정의 명을 모르고 있었는데, 사당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므로 이상히 여겨 문을 열고 보았더니, 공의 부친 신주가 신주 상에서 창 밑까지 굴러 내려와서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괴로워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사약을 받게 되자 온 집안이 크게 울부짖는데도 공은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고 꿇어앉아 임금의 명을 받았다. 목욕하고 의관을 정돈하는 동작도 평소와 같았다. 스스로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무엇 때문에 내가 죽는지 모르겠다.” 하고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더니, 큰 글씨로 쓰기를, “천지신명은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하고, 그것을 아들에게 주면서, “내가 화를 입었다고 기죽지 말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주색을 조심하여 지하의 혼을 위로하여다오. 장례는 검소하게 지내되 예법을 어기지 말라. 부끄러움을 가지고 사는 것은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만 못하니라.” 하고, 아우 기수에게 전해 주라는 편지에, “자식 하나를 그대에게 부탁하니,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글씨가 힘이 있어 펄펄 생기가 넘쳤다. 이어 조용히 죽었는데, 이날 밤 흰 기운이 무지개처럼 지붕을 뚫고 하늘까지 뻗치어 여러 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1547년 9월19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송인수의 졸기가 실려 있다.
전 참판 송인수를 청주에서 죽였다. 송인수의 자는 미수 眉叟이고 은진인恩津人이며, 청주의 마암에 우거하였었다. 기질이 청명하고 덕성이 순수하며 독실히 배워 힘써 실천하였다. 중종 때에 간신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아 멀리 사천현으로 귀양 가서 4년 동안 있으면서 문밖을 나가지 아니하였다. 김안로가 처벌되고서 조정에 들어왔는데 미처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금상 今上 초기에 또 다시 이기 · 윤원형 등에게 무함을 당하여 마침내 참화를 당하고 말았으니 애통한 일이다.
그는 장가들던 날 저녁에도 불을 밝혀 놓고 글을 읽어 사람들이 “글에 미쳤다.” 할 정도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또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하니 사람들이 그의 강한 의지에 감복하였다. 그런 그가 외척들의 농간에 사약을 받았으니 천지신명도 참 무심하다.
장성 기영정에는 그가 쓴 시가 마루에 걸려 있다. 아쉽게도 진도 벽파진에 있다는 벽파정은 지금은 없다. 그의 신위는 청주 신항서원 莘巷書院, 전주 화산서원 華山書院등에 배향되어 있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다음 회는 “ 소재 노수신 - 19년 유배 중에 진도를 개화시키다.
- 진도역사박물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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