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15. 석천 임억령, 동생과 인연을 끊다 - 담양 식영정, 해남 해촌서원, 화순 도원서원 |
입력시간 : 2009. 10.22.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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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 지키기 위해 형제 우애 끊고 낙향
식영정서 당대 인물들과 글 쓰며 교분
잘 있거라, 한강수야
평온하게 흘러서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
好在漢江水
安流莫起波
1545년 7월 인종이 승하하고 11살의 명종이 즉위한 직후,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친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린다.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당을 모두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이 때 윤원형 일파의 오른팔인 임백령은 형 임억령에게 이 모의를 알리고 함께 일하기를 권유한다.
임억령은 아우인 백령에게 피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백령이 말을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임억령은 한강까지 전송 나온 백령에게 위 시를 지어준다. 괜스레 외척들이 붕당이나 일으켜서 죄 없는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석천 임억령 (1496-1568). 그는 시문에 뛰어난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불리는데 해남 동문 밖 해리에서 태어났다. 석천(石川)이란 호도 그가 태어난 마을의 개울 이름이다. 그의 형제는 오형제였는데 이름 중에 마지막 글자 령은 문중의 항렬이고, 가운데 글자는 대망을 의미하는 숫자인 천, 만, 억, 백, 구를 얹어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이라 하였다.
셋째인 억령은 부친을 여윈 14세 때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눌재 박상(1474-1530)의 제자가 된다. 이 때 동생 임백령도 같이 공부를 하였는데 박상은 억령에게는 장자를 읽으라고 하면서 ‘너는 문장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백령에게는 논어를 공부하라고 하면서 ‘족히 나랏일을 담당할 것’이라 하였다.
어릴 적에 석천은 벼슬에 별 뜻이 없었다. 30살이 된 1525년에야 과거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1544년에는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임백령(? -1546)은 15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이조 참판, 호조판서 등을 거쳐 을사사화 당시에는 이조판서 이었다. 그는 2001년-2002년에 방영된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에서 기생 옥매향을 사이에 두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사랑싸움을 벌인 사람이기도 하다. 야사에 의하면 임백령은 윤임이 그의 정인(情人) 옥매향을 소실로 삼은 것에 분노를 느껴 을사사화 때 윤임에게 복수를 했다 한다.
다음 해 5월에 임억령은 동생 백령의 추천에 의해 원종(原從) 공신의 녹권(錄卷)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산골 외진 곳에 가서 제문을 짓고 녹권을 불사르며 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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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가 늙었으니 베어 쓰이는 것 피하였고
소나무는 고상하여 벼슬을 받지 않는다.
누가 송죽과 같이 지조를 같이 할꼬
깊은 골짜기에 머리 흰 늙은이로다
竹老元逃削 松高不受封
何人與同調 窮谷白頭翁
이 시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지조를 위해 형제간의 우애도 끊고자 하는 석천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1545년 11월 7일의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산군수 임억령이 신병으로 사직원을 내니 윤허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 이 실록에 사관은 “임억령은 사람됨이 소탈하여 얽매인 데가 없었으며, 또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쾌히 멀리 떠나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니 그의 동생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고 평하고 있다.
그러면 출세한 임백령은 어떠했을까. 우의정으로 승진한 임백령은 1546년 6월에 사은사로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병으로 죽는다.
한편 전라도로 낙향한 임억령은 해남, 창평, 강진에 별장을 두고 자연 강산을 즐기며 산수 유람을 한다. 또한 스승인 눌재 박상의 유고문집도 발간한다. 이 무렵 동생 구령은 광주목사였다.
몇 년 후에 그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 1554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된다. 이 때 금강산과 관동의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수의 시를 짓는다. '송계만록'에는 그가 꿈에 지은 관동팔경 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임억령은 꿈에 시 한 연구(聯句)를 얻었다.
바람은 마른 잎 나부끼어 강 언덕에 지고 風飄枯葉江干墮
구름은 먼 산 안고 바다 위에 솟아난다. 雲抱遙岑海上生
그 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삼척 죽서루에 올라보니, 보이는 것이 과연 꿈에 본 것과 같았다.
그가 담양부사를 한 것은 62세인 1557년이다. 3년 후에 그는 담양부사 직을 사직하고 담양 성산 아래 식영정에서 자연을 벗 삼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낸다. 이 때 식영정을 다닌 인물로는 면앙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등이었다. 특히 석천과 하서, 고봉과 송천을 성산 사선(四仙)이라 하였고, 석천과 서하당, 송강, 제봉을 식영정 사선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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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영정 사선들은 식영정 20영을 지었다. '식영정 20영'은 식영정과 성산 근처의 이름난 20가지 풍광을 시로 쓴 것이다. 그것은 서석한운(瑞石閑雲), 창계백파(蒼溪白波), 벽오양월(碧梧凉月), 조대쌍송(釣臺雙松), 환벽영추, 노자암(鰲伸巖), 자미탄(紫薇灘), 도화경(桃花徑), 부용당(芙蓉塘), 선유동(仙遊洞)등으로서 임억령이 먼저 시를 짓고 김성원, 정철, 고경명이 차운하였다.
그러면 석천과 송강이 쓴 벽오양월이라는 시를 감상하여 보자. 벽오양월은 벽오동 나무에 비치는 서늘한 달이라는 뜻인데 먼저 석천의 시이다.
가을 산이 시원한 달을 토해 내어
한 밤중에 뜰에 서 있는 벽오동나무에 걸렸네.
봉황은 어느 때에나 오려는가.
나는 지금 천명이 다해가는데.
秋山吐凉月 中夜掛庭梧
鳳鳥何時至 吾今命矣夫
다음은 송강의 차운시이다.
선생의 마음은 봉황을 품었는데
달은 벽오동나무 가지 끝에 걸렸구나.
백발이 가을 거울 속에 가득하니
쇠잔한 얼굴은 이제 대장부가 아니구나.
人懷五色羽 月掛一枝梧
白髮滿秋鏡 衰容非壯夫
한편 식영정 마루에는 '식영정기'편액이 걸려 있다. 이 글도 석천이 지었는데 그의 그림자 쫓기 글은 장자의 기품이 가득하다.
'김군 강숙(剛叔 김성원의 자)은 나의 친구이다. 창계의 위 쪽 우거진 솔숲 아래의 한 기슭을 얻어,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다. (중략) 이 정자를 나에게 휴식할 곳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숙이 정자 이름을 지어 주기를 나에게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장주(莊周 장자의 이름)의 말을 들은 일이 있는가? 장주가 말하기를,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사람이 빨리 달아나면 빨리 쫓아오고, 천천히 달아나면 천천히 쫓아와서 끝끝내 뒤만 쫓아다니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너무나 다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문득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략)'
‘그림자도 쉬고 있는 정자’(식영정)란 이름은 단지 서정적인 뜻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호방하고 무애한 경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거기에는 은둔과 조화와 순리의 동양사상, 다시 말하면 노자와 장자의 자연론이 담겨 있다.
석천은 3,000수나 되는 시를 남긴 시문의 종주였다. 시 솜씨는 이백을 닮았고 만년에는 두보의 시법을 터득하였으며 문장은 장자의 남화경을 근본으로 하였다. 그는 세속에 얽매임이 없는 도인이었다.
눈은 도를 사색하느라 감았고
머리는 세속을 싫어해 숙였도다.
스스로 장주(莊周)의 학문을 체득하니
영광과 괴로움이 하나로 여겨지네.
석천의 시는 담양의 식영정 이외에도 면앙정, 소쇄원, 장성 관수정, 광주 풍영정등 광주, 담양, 장성 지역 여러 곳에 걸려있다.
그의 신위는 해남 해촌서원과 화순 도원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해촌서원도 그 혼자 배향된 석천사 이었는데 최부, 유희춘, 윤구, 윤선도, 박백응 등 해남 현인들이 추배되어 해촌서원으로 이름 붙여졌다. 그가 화순 도원서원에 배향된 것은 1533년부터 3년간 동복현감으로 근무하면서 신재 최산두와 자주 어울린 것이 인연이 되었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미암 유희춘, 19년 유배 중에도 학문에 정진하다 - 담양 연계정·모현관, 광주 무양서원, 해남 해촌서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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