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 사람들의 피눈물, 화순 해망서원 |
입력시간 : 2009. 05.21.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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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 조의제문 발단 연산군 광기 드러내
무오·갑자사화로 희생 당한 사림 5인 위로
화순군 춘양면에 있는 해망서원(海望書院)을 간다. 해망서원은 김종직의 제자 정여해(1450-1520)가 중종3년(1508년)에 무오(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로 희생을 당한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과 김굉필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해망단이 그 시초이다.
차 안에서 나는 몇 년 전에 보았던 '왕의 남자' 연극의 첫 머리에 나오는 연산군의 독백이 생각났다.
“선대왕이시여, 선대왕 마마를 능멸한 김일손을 능지처참하였습니다. ‘아니 되옵니다’란 말만 일삼은 사림파들도 모두 다 몰아내었습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에 사림(士林)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다. 사관(史官) 김일손(1464-1498)이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史草)에 그의 스승 김종직(1431-1492)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김종직 문하의 사림들이 송두리 채 화를 입었다. 이 사화는 사초가 문제가 되어 일어났기에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그러면 조의제문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세조 3년 (1457년) 10월 과거 시험에 낙방한 김종직은 경상도 밀양을 나서 성주 북쪽 10리에 있는 답계 역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런데 꿈에 중국 초나라의 어린 왕 의제(義帝)가 “항우가 나를 죽여 침강에 빠뜨렸다”고 하소연 하였다. 참으로 괴이하다 싶어 붓을 들어 의제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 바로 조의제문이다. 이 시기는 폐위된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서 세상을 떠난 직후이며 그의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는 등 이상한 소문이 흉흉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은 사초에 조의제문을 실으면서 ’김종직이 꿈속에서 보고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을 지어 충성스런 울분(忠憤)을 붙였다‘는 평을 같이 적어 놓았다.
평소에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사림파로부터 비난을 받아온 유자광, 이극돈등 훈구파들은 사초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유자광은 연산군 앞에서 “김종직이 조의제문에서 항우가 의제를 죽이고 의제를 애도한 것은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판하고 단종을 불쌍하게 여기는 뜻이 있다”고 낱낱이 고하였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이다. 세조는 김종서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 한 후 어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이 되었으며, 단종 복위 거사를 꾀한 집현전 학사 성삼문 등 사육신을 죽이고 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도 죽인 정권욕에 불탄 임금이다. 그래서 세조는 집현전을 폐쇄하였고 의리와 충효를 중시한 유학을 위축시키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집권 내내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리었다.
그런데 사관 김일손이 세조를 은근히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실록에 올리려 하였으니 이런 망극한 일이 또 있으랴. 이는 왕조에 대한 도전이요 선대왕에 대한 능멸이다.
한편 연산군 입장에서 보면 사림파들이 자기를 유희와 방탕에 빠져 있다고 사사건건 간언하여서 성가신 참에 참 잘 된 일이었다. 또한 훈구파 입장에서도 사림파를 일거에 싹쓸이할 절호의 기회였다. 따라서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고 김종직의 사림파들은 송두리째 화를 당한다.
이미 6년 전에 죽은 김종직은 시체를 파내고 관을 쪼개어 다시 죽이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김일손은 대역죄로 사지가 찢겨지는 능지처참을 당한다. 정여창은 불온한 유언비어를 날조한 혐의로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가고 김굉필은 붕당을 하여 나라를 농락한 혐의로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을 간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를 배웠거나 사림파를 동정한 이들은 모조리 화를 당한다.
여기에서 김종직과 김일손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조선의 성리학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로 이어진다.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를 이어받아 성리학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그는 세조 때에 급제하여 성종 임금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자 그의 제자들이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였다. 그의 제자는 도학에 명성이 있는 김굉필, 정여창등과 문장에 이름난 김일손, 조위 등이 있다.
김일손은 더러운 세상을 깨끗이 하고자 하는 현실 정치 개혁에 의욕이 강한 젊은 선비였다. 그의 호는 탁영(濯纓)이다.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인데, 이는 굴원의 '어부사'에 나온다. 굴원이 죽고자 양자강 지류 멱라강을 배회하고 있을 때 한 어부가 굴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창랑의 물이 깨끗하면 내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이 말은 세상이 맑을 때는 속세에서 벼슬을 하고 세상이 혼탁할 때는 속세를 떠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김일손은 ‘내 갓 끈을 씻을 수 있도록 창랑의 물을 깨끗하게 하겠노라’는 의지를 지닌 호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는 깨끗한 정치를 하여 역사에 부끄럼 없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 사관으로서 단종애사를 춘추직필(春秋直筆)하여 후세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기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편 무오사화로 유배 간 정여창(1450-1504), 김굉필(1454-1504)은 갑자사화로 인하여 다시 화를 당한다. 생모 윤씨가 폐위되고 사약을 마신 것에 눈이 뒤집힌 연산군은 훈구파와 왕실 관련자를 모두 싹쓸이 하는데 사림파들도 다시 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함경도 종성 유배 중에 이미 죽은 정여창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김굉필은 순천의 저자거리에서 참수를 당한다.
이윽고 해망서원에 도착하였다. 해망단을 세운 정여해는 하동정씨로서 정여창의 동갑내기 십촌 동생이다. 그는 능주 출신으로서 병으로 고향에 돌아와 사화를 피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세상이 싫어 하동에서 이곳 해망산 아래로 은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운 좋게도 서원에서 정씨 문중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덕분에 숭의사 사당에 모시어져 있는 김종직등 다섯 분의 신위를 볼 수 있었다. 김종직은 가운데에 있고, 오른쪽에는 김일손과 김굉필, 왼쪽에는 정여창과 정여해의 신위가 있다. 그들에게 묵념을 드렸다.
"선현들이여, 당신들께서는 도학과 의리가 바로서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탐욕과 방탕의 무리들로부터 피바람을 맞았구려. 저희는 510년 전에 흘린 그대들의 피눈물을 결코 잊지 않으렵니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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