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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1.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입력시간 : 2009. 04.23. 00:00



수구세력에 꺾인 개혁정신 애달프다

박상, 중종비 신씨 복위추진 기묘사화 불씨

중벌에 처할 위기서 조광조 간언으로 모면

호남은 옛날 호강(湖江·지금의 금강) 아래를 말하며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지역 이름이다. 세상이란 하늘은 같아도 땅과 사람이 다르므로 문화와 정신은 지역적 특징을 갖게 된다.

호남 정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의(義)이다. 정의, 절의, 충의가 바로 호남정신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항일운동, 5·18민주화운동등은 바로 호남정신의 발로이다.

여수 출신으로 호남의 정신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의 집필로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장기연재를 시작한다. 김 위원장은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이자 아람문학협회 회원이기도 한 문필가로 다수의 노동관계 서적과 수필집을 냈다. 특히 그가 최근 펴낸 '송강문학기행'은 그의 호남정신에 대한 사랑과 가사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이 연재는 조선시대 중기 4대 사화에서부터 시작한다. 편집자주

1. 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관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가는구나.

후일 저 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더라도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 일랑 더 이상 논하지 마세나.

無等山前曾把手 무등산전증파수

牛車草草故鄕歸 우차초초고향귀

他年地下相逢處 타년지하상봉처

莫說人間謾是非 막설인간만시비

1519년 기묘사화로 능성현(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으로 귀양 온 정암 조광조(1482-1519)가 사약을 받고 죽은 후, 이듬해 봄에 그의 시신이 경기도 용인으로 떠나간다. 눌재 박상(1474-1530)은 그의 관이 실린 소달구지를 먼발치로 보면서 만시(挽詩)를 짓는다. 시 제목은 ‘효직의 상을 당하여’(효직은 조광조의 字)이다. 상여 줄을 끌면서 만가를 부르듯이 시가 매우 애절하고 장엄하다.

이 시의 첫 1구, 2구는 박상과 조광조와의 과거와 현재의 인연 이야기이다. 1519년 11월 박상은 무둥산 앞 분수원 (지금의 광주 남문 밖)에서 유배 내려오는 조광조를 만나 슬픔을 나누웠다. 그 때 그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시를 건넨다.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손잡고 헤어졌을 때

그대가 조정에서 일하다가 천리나 되는 이곳에 귀양 옴을 이상하게 여겼노라

귀양살이와 조정에서 벼슬함을 구별하지 마소

저승에 가면 아무런 차등이 없는 것이니.

그런데 조광조는 유배 온지 한 달도 못 되어 사약을 받았고 그의 친구 학포 양팽손(1488-1545)이 수습한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서 바삐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비참하고 애달프다.

3구와 4구는 두 사람이 내세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면서 그때에는 현세에서의 부질없는 시비는 하지 말자고 읊는다. 여기에서 시비란 그가 겪었던 신비복위소 사건과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급진적 개혁정치를 말한다.

1515년 8월, 당시 담양부사였던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폐위된 중종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순창군 강천사 삼인대에서 올렸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이며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인데 신수근은 1506년의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박원종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면 자신들이 위태로울까 보아 신씨를 7일 만에 폐위시키고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1515년 3월초에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후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죽자 박상 등은 신비 복위소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조강지처를 폐위시킨 박원종 등의 행위는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므로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조정은 이 상소로 인하여 논쟁에 휩싸였다. 박상과 김정 등은 중벌에 처해질 분위기이었으나 조광조의 간언으로 박상은 전라도 남평으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 상소는 사림들의 의리정신을 일깨워 사림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기묘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조광조에 대한 시비는 곧 사림파의 개혁정치에 대한 시비를 말한다. 1518년에 대사헌이 된 조광조는 중종을 설득하여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훈구 외척 공신들의 공훈을 3/4이상 삭탈하는 조치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혁정치는 보수 세력인 훈구파의 반발을 크게 사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조광조는 38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았다.

한편 광주 출신 박상은 호남 유학의 종조(宗祖)로 평가되며 허균(1568-1618)의 '성옹지소록'에도 호남 출신 인재의 선두에 박상 이름이 나온다.

중종 임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의 인재로서 드러난 자가 매우 많았다. 눌재 박상과 육봉 박우 형제, 사인(舍人) 최산두, 미암 유희춘과 유성춘 형제, 교리 양팽손, 제학 나세찬, 목사 임형수,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삼재(三宰) 송순, 찬성(贊成) 오겸 같은 사람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이들이다.
그 후로도 사암 박순, 일재 이항, 송천 양응정,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정조임금이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시를 잘 썼고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 권14 문장부에도 박상은 뛰어난 시인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제자로 송순, 임억령, 김인후등 당대의 거출한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근세의 시인은 호남에서 많이 나왔다. 눌재 박상 , 석천 임억령, 금호 임형수,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사암 박순,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제봉 고경명등은 남달리 우뚝 뛰어난 사람들이다.

눌재를 만나려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송호영당을 가면 된다. 거기에는 그의 영정과 시문집 '눌재집'이 보관되어 있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