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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역사 이야기

임권 택 -영화 천년학 1

 

 

 

   

[명사에게 듣는 산이야기] 임권택 영화감독

100번째 영화 ‘천년학’ 촬영 마무리
“자연과 산은 있는 그대로, 없으면 마음으로 보는 것”

▲ 임권택이 그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 촬영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사진=스튜디오'끼' 김채영 작가 제공.
거장(巨匠) 한 사람이 영화를 꼭 100편 만들었다. 그 100번째 영화가 올 4월 중순쯤 개봉될 예정인 ‘서편제’(영상으로 보는 판소리가 주 내용)의 속편격인 ‘천년학’(판소리가 직업인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능할까? 1년에 한 편씩만 찍어도 100년이 걸린다. 그러면 도대체 1년에 몇 작품을 만들었단 말인가? 서너 작품, 아니면 다섯 작품? 가능한가?

영화란 기본적으로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예술활동이다. 인간의 창의력은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지속적으로 발휘하긴 무척 어렵다. 이 창의력에 탁월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있어야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온다. 보통 감독은 1년에 한 편 찍기도 쉽지 않은데, 여러 편씩이나 촬영하는 창의력 넘치는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그가 바로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영화감독 임권택(71)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그의 이름을 빼면 중량감이 뚝 떨어지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대표 국민감독, 한국 영화의 대부(代父) 아닌가? 그런데 그는 스스로 아니라고 한다. 지난 2005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아시아인 처음으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하자 독일 유력지 슈피겔에서 ‘한국 영화의 대부’라고 표현했다.

당시 임권택 감독은 “그냥 해본 소리겠지. 간지럽기 짝이 없다. 그냥 도태되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노력한 데 대한 예의적 표현이겠지”라고 말했다. 겸손이 넘쳐흐르는 반응이다. 실제로 그를 만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얘기가 “후덕하고 어눌한 외모가 과연 이 사람이 세계적인 영화감독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한다. 그의 감추어진 끼(?)는 겸양으로 발휘되는가 보다.

아시아 첫 베를린 영화제 ‘명예황금곰상’ 수상

실제로 그의 수상내력만 봐도 그가 얼마나 탁월한 감독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2005년 아시아 첫 명예황금곰상(베를린영화제), 2004년 골드메달(국제저작권관리연맹), 2004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2002년 페데리코 펠리니 메달(유네스코), 2002년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2002년 금관문화훈장, 2000년 제14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1999년 20세기를 빛낸 예술인(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1998년 제41회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구로사와상, 1998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7년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1992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대한민국 청룡영화상 네 차례, 대종상 아홉 차례 등등.

영화 관련 굵직한 수상기록만 정리한 것이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이렇게 큰 상을 여러 차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이 받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그의 삶 자체가 가난과 고난, 질곡의 과정을 겪어 영화로 표출되는 것인지 모른다. 한 편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장면이 그의 삶 곳곳에서 나온다.

36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의 좌익활동으로 인한 그늘로 자유스럽지 못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당연히 먹을거리도 없이 가난 속에 살아야만 했다. 어느 날 그는 가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가출한다고 해서 그에게 나아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대로였다. 단지 부모품만 떠났을 뿐이었다.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연명했다. 6·25가 끝난 후에는 여기저기서 모은 헌 군화를 파는 일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영화판 일을 하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귀가 솔깃한 그는 그 날로 바로 찾아가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게 바로 1955년이었다. 그에겐 운명의 해였고, 한국영화계로선 행운의 해였다. 물론 행운의 의미란 그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고통을 감내한 결과가 포함된 것이다.

충무로의 신참내기 임권택이 주로 하는 일이라곤 소품 조수, 잔심부름, 식사 배달 등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것이었다. 촬영 내내 현장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누가 부르면 바로 달려가고, 마음 편하게 밥도 못 먹고…. 미래의 거장도 신참 때는 다른 사람과 똑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은 있었다. 모든 걸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봤다는 점이다. 그게 나중의 거장과 범부의 본질적인 차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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