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어떤 곳인가
충청남도 중부에 있는 예산군(禮山郡)은 동쪽은 공주시, 서쪽은 홍성군과 서산시, 남쪽은 청양군, 북쪽은 당진군과 아산시와 접한다. 지형은 일반적으로 구릉과 산맥이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동부와 서부 군계는 금북정맥을 중심으로 산이 겹친다. 군의 중앙부는 금북정맥에서 발원한 무한천·삽교천 2개의 하천이 북으로 흐르며, 그 유역엔 기름진 예당평야가 펼쳐져 쌀의 주산지를 이룬다.
백제 때는 오산현(烏山縣)이라 했고, 삼국통일 뒤 757년(경덕왕 16)에 고산현(孤山縣)으로 되었다가 919년(고려 태조 2) 예산현(禮山縣)이 됐다. 1018년(현종 9)에는 천안부(天安府)에 속했다가 1895년(조선 고종 32)에 홍주부 예산군·대흥군(大興郡)·덕산군(德山郡)으로 개편됐다. 1914년 덕산군·대흥군이 통합되어 예산군으로 개편됐고, 1940년 예산면이 읍으로 승격됐으며, 1973년 삽교면(揷橋面)이 읍으로 승격됐다. 2006년 현재 예산·삽교읍과 고덕·광시·대술·대흥·덕산·봉산·신암·신양·오가·응봉면 총 2읍 10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의 중앙부에 삽교천과 무한천이 있고 예당저수지가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다. 예당평야에서 생산되는 예산쌀은 밥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농가는 군 전체 세대의 42%를 차지하고, 동서의 구릉지대에서는 양잠이 활발하며, 젖소·닭 등의 축산도 이루어지고 있다.
특산물인 예산사과는 연간 35,400t을 생산, 425억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과수원은 주로 삽교읍·고덕면·오가면에 형성되어 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작목 종합시범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한과·꽈리고추·팽이버섯·오이·토마토·수박·전통옹기 등의 농특산물이 있다. 그 외에 무연탄·활석 등이 산출되며, 신례원(新禮院)을 중심으로 섬유공업이 발달해 있다. 농업용수·생활상수도·공업용수 등은 예당저수지와 삽교호 등에서 공급받아 이용한다.
예산읍이 중심지가 되어 온양 방면, 당진 방면, 홍성 방면, 공주 방면 등 네 갈래의 교통로가 이곳으로부터 펼쳐져 있어 충청남도 북서부지역 도로교통의 중심이자 분기점 역할을 한다.
군에는 3개의 국도가 개설되어 있는데, 서산시 해미면에서 진입해 덕산면·삽교읍·오가면·예산읍을 거쳐 아산시 도고면으로 향하는 국도, 당진군 합덕읍에서 진입해 신암면·예산읍·대술면·신양면을 거쳐 공주시 유구읍으로 향하는 당진∼공주 간 국도, 아산시 도고면에서 진입해 예산읍·오가면·응봉면을 거쳐 홍성군 홍북면으로 향하는 아산∼홍성 간 국도가 있다. 이 세 국도는 모두 예산읍에서 교차하며, 군내 교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 이밖에도 군에는 5개 지방도와 16개 노선의 군도가 개설되어 있다.
철도의 경우 1931년에 개통된 장항선이 군의 중앙부를 지난다. 고속도로의 경우 군을 직접 통과하지는 않아도 서쪽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간 고속도로가 지나기 때문에 접근성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수덕사|
덕숭산(德崇山·495.2m)에 있는 수덕사(修德寺)는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제30대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혜근)이 중수했다. 일설에는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했다고도 전한다. 조선 후기인 1865년(고종 2)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수덕사 대웅전|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수덕사의 대웅전(국보 제49호)은 1936년에서 1940년에 걸친 중수시 대들보에서 나온 묵서에 의해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됐음이 밝혀진 건물이다. 건축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조형미가 뛰어난 고려시대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이다.
앞면 3칸, 옆면 4칸,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계통의 건물이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소 꼬리 모양의 우리량은 그 중 백미로 꼽으며, 연등천장과 노출된 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은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건축물로,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수덕사 노사나 괘불탱|
이 괘불은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하여 12대보살, 10대제자 등 여러 무리들이 그려진 그림이다.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이란 명칭이 머리광배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체에 비해 두 손을 크게 강조하여 노사나불이 주존임을 뚜렷이 나타내주고 있다. 보관과 가슴에 달린 장식, 옷의 문양, 매듭 등이 화려함을 보여준다. 12대보살은 중단과 하단에 걸쳐서 배치되어 있으며, 아난과 가섭을 비롯한 십대 제자상은 자유로운 표정과 동작을 보이며 상단에 배치되어 있다.
1673년(조선 현종 14)에 제작된 이 괘불은 노사나불을 단독으로 나타낸 독특한 형식의 그림으로,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공간을 오색의 광선으로 처리해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며, 화기에는 괘불도 제작에 사용된 탱·포·바탕시주와 주황·황금 등 안료시주, 식염의 공양시주 등의 시주자 명단이 명기되어 있고, 화사는 응렬, 학전, 석릉 등 신원사 괘불도와 같다. 보물 제1263호.
|고암 이응로 선생 사적지|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입구의 이응로 선생 사적지(李應魯先生事蹟地)는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화가 이응로(1904-1989)가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호는 고암(顧菴). 수덕여관은 이응로가 1944년 구입해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도 사용했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으로 옮긴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수덕여관 앞 바위조각은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성함과 쇠함을 추상화해 표현한 작품이다.
|수덕사 목조삼세불좌상|
수덕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 삼세불좌상(보물 제1381호)은 수덕사의 중흥조인 만공(滿空) 선사가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약사불,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주존으로서 굽어보는 듯한 자세에 당당한 어깨와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되어 보인다. 옷은 양어깨를 다 덮는 통견(通肩) 형식으로 오른팔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17세기 불상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또한 머리 모양, 얼굴 형태와 귀·눈·입·코의 표현, 양 손과 옷주름선의 사실적 묘사 등이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조성기에 의해 1639년(조선 인조 17)에 수연(守衍) 비구를 비롯한 7명의 화원(畵員)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석가모니불이 앉아 있는 대좌형 수미단(須彌壇)은 금강저(金剛杵)·삽화병(揷花甁)·목단(牧丹)·운파(雲波) 등 안상(眼象) 조각에서 고려시대 불탁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조성시기는 대웅전 건립연대(1308)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 안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발원문을 비롯해 묘법연화경·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불설관세음경 등의 경전과 진언문 및 다라니로서 17세기 초반에 간행된 목판본이 주를 이루는 전적류, 5색의 사각형 직물 안에 원형, 금강저, 삼족(三足)과 육족(六足)의 번(幡)을 의미하는 형태의 직물이 들어 있던 후령통(喉鈴筒), 조선 중기 직물사 및 염색에 관해 살펴볼 수 있는 복식 등이 있다.
|추사 고택|
신암면 용궁리의 김정희 선생 고택(시도유형문화재 제43호)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옛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2동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이 지은 집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했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했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 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했다. 입장료는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는 무료. 전화 041-332-9111
|예산 김정희 종가유물|
이것은 추사 김정희 종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추사의 작품과 유물이다. 유물로는 생전에 지니던 인장, 염주, 벼루, 붓의 유물류와 습작부터 편지, 달력, 필사본, 대련 등에 이르는 유묵, 그리고 독립된 서첩인 금반첩과 심경첩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총 54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관리되고 있다. 1857년(철종 8) 이한철이 그린 김정희 영정(가로 57.7cm, 세로 131.5cm)도 함께 지정·보관되고 있고, 모두 일괄적으로 보물 제547호로 지정됐다.
|예산 백송|
백송(白松)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 빛이 되므로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한반도의 백송은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 근처에 있는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은 추사가 1809년(조선 순조 9) 10월에 부친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김정희 선생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려 주신 백송이 있어 백송은 김정희 선생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 백송은 수령이 약 2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이다.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며, 주변의 어린 백송들과 함께 자라고 있다.
|충의사|
덕산면 시량리는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狙韓堂)이라 한다.
윤봉길 의사의 사당인 충의사는 크게 4개 구역으로 나뉜다. 본전 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기념관, 어록탑을 비롯해 보부상전시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유품(보물 제568호) 28종 56점이 전시되어 있고, 의사의 짧은 일대기를 매직비전 11대와 각종 영상과 디오라마로 보여주고 있으며, 영상관, 11경도실 등이 있다.
성장가 지역은 의사가 4세 때부터 망명 전 23세 때까지 기거하던 저한당과 의거기념탑, 동상이 있다. 생가지역은 윤봉길 의사께서 사방으로 냇물이 흘러 ‘한반도 가운데 섬’이란 뜻으로 도중도(島中島)라고 명명했다. 여기에는 의사가 출생하여 4세 때까지 살던 광현당과 야학을 운영하던 부흥원 등이 있다. 요금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전화 041-330-2552
|윤봉길의사 유품|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품(보물 제568호)들이다. 의사는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했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해 1931년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그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19일 일본 대판 위수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충의사 유물전시관에는 1 선언문 2 윤봉길 의사 이력서 3 회중시계 4 지갑 5 도장 6 손수건 7 안경집 8 일기(日記) 9 월진회 창립취지서 10 농민독본 11 형틀대 12 편지 13 월진회 통장 14 월진회기 15 편지 16 부흥원 대들보 17 선서 사진 18 연행 사진 19 벼루 20 모팔통 21 책상 22 친필 24 위친계 취지서 25 연상 26 담배합 27 주발, 대첩 28 수저 29 놋대야 30 등잔대 총 30종 58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다.
|삽교 석조보살입상|
삽교읍 신리 수암산 중턱에 위치한 예산삽교 석조보살입상(보물 제508호)은 2개의 돌을 이어서 조각한 석불이다. 머리에는 두건 같은 관을 쓰고 있고, 그 위에 6각으로 된 갓 모양의 넙적한 돌을 올려놓았다. 왜소한 어깨의 윤곽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조금씩 넓어지지만 양감이 전혀 없이 밋밋하여 마치 돌기둥 같다. 왼손은 몸에 붙인 채 아래로 내리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돌지팡이 같은 것을 잡고 있는데, 양발 사이까지 길게 내려오고 있다. 거구이면서 불륨 없는 돌기둥 형태, 간략한 신체표현 방법 등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과 유사한 양식을 가진 지방적인 특징이 보이는 고려시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