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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역사 이야기

예산 2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충남예산


추사 고택을 찾을 때의 즐거움은 또 있다. 바로 길가에 즐비한 사과밭을 지나는 일이다.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늦가을도 괜찮지만, 새하얀 사과꽃이 피어나거나 꽃잎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봄날이라면 더더욱 즐거움은 곱절이 된다. 백두대간 기슭의 사과 산지와 달리 나지막한 사과 언덕이 고향처럼 한층 정겨운 풍경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추사고택을 벗어나면 멀리 서쪽에서 가야산(伽倻山·678m)이 부른다. 백두대간의 속리산(1,058m)에서 뻗어나와 금강 이북 지방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금북정맥이 서해로 빠져 세력을 다하기 전에 남은 힘을 쏟아 예산과 서산 사이에 빚은 산이 바로 가야산이다. 비록 600m급의 산일 뿐이지만, 서해 가까운 내포평야에 솟았기 때문에 상대적 해발고도가 높아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포의 중심이란 위상도 대단하다. 신라 때 나라에서는 산 동쪽에 가야사를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 현감이 이곳에서 봄·가을로 제를 올리기도 했다.

▲ 덕숭산 기슭에 자리한 수덕사 전경. 수덕사는 한국 불교계의 명가인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고 있는 절집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가야산 자락에는 100여 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알려진 절은 가야사 개심사 수덕사 보원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보원사와 가야사는 폐사가 되었고, 개심사와 수덕사는 남아있다. 폐사된 가야사와 국보인 대웅전을 품고 있는 수덕사가 예산 고을에 주소를 두고 있다.

가야사(伽倻寺)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때는 인근의 수덕사보다 규모가 큰 절집이었다 한다.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 절에 금탑(金塔)이 있는데, 매우 빼어난 철첨석탑으로 탑의 사면에는 감실을 만들어 석불을 봉안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절터는 예부터 2대에 걸쳐서 왕손이 나온다는 대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불행은 여기서 시작한다.

젊은 시절 안동김씨의 세도에 밀려 파락호 시절을 보낸 야심가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이 명당에 눈독을 들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이 있었고, 지관이 점지해준 묏자리에는 금탑이 서있었다. 누구보다도 풍수지리를 굳게 믿었던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불을 질러 폐사를 만들고는 아버지 남연군(南延君·?-1822)의 묘를 이곳에 옮기고 때를 기다렸다.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고,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아들이 실제로 왕이 되자, 불태운 가야사에 사죄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865년 남연군묘 맞은편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우고 원당 사찰로 삼았다. 당시 이장 때 썼던 상여(중요민속자료 제31호)는 남은들 주민들에게 하사했는데, 그 동안 광천리에 보관하던 남은들 상여를 얼마 전 남연군묘 옆으로 옮겨놓았다.

1868년 4월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의 도굴사건이 터졌다. 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대원군과 흥정을 위하여 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을 도굴하려 했다. 아산만에서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와 덕산 구만포에 상륙한 오페르트 일당은 덕산군청을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민가에서 발굴도구를 약탈하여 남연군묘를 파헤쳤다. 그러나 묘광이 견고하여 실패했고, 날이 밝아오자 철수하였다. 이는 대원군이 쇄국양이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 탄압도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과거에도 그랬고, 요즘도 대권을 노리는 이들은 조상의 음택에 집착한다는 기사를 접하고 보면, 아무래도 풍수에 대한 믿음이 조선 말기보다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풍수의 힘으로 권좌를 차지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 과정에서 이하응처럼 하늘의 뜻을 거역한다면 불행한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가야산을 뒤로 하고 덕숭산(德崇山·495.2m) 기슭의 수덕사(修德寺)로 간다. 수덕사에는 두 분, 곧 조선 후기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하여 무애의 생활 속에서 전등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禪佛敎)를 진작시킨 경허 성우(鏡虛 性牛·1849-1912) 선사, 경허의 제자로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시킨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 선사가 덕숭산처럼 우뚝 솟아 있다.

만공은 일제강점기 선학원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 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한 스님이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미나미 총독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해 치욕스러운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 불교계의 명문가인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만공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용음·서경·혜암·전강·금오·춘성·벽초, 비구니 법희·만성·일엽 등 뛰어난 제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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