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충남예산 | ||||
김일엽(金一葉·1896-1971) 스님은 출가 전인 1920년에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여성해방을 주장하며 자유연애를 구가하던 신여성이었다. 이후 결혼에 실패하고,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껴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산문에 들었다. 글은 차마 버리지 못하였으나 나중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또 다른 한 여자,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1896-1949)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김일엽과 더불어 당대를 풍미하던 신여성이었다. 1922년부터 32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선과 특선을 했으나 그녀는 단순한 화가 이상이었다. 동경 유학에서 귀국 후 3ㆍ1운동에 참여했다가 5개월 동안 옥살이를 겪은 민족주의자요, 파리에서 수업한 최초의 한국 서양화가요,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치며 인간평등에 기초한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해방론자였다. 너무 일찍 핀 매화는 꽃샘추위에 얼어버린다 했던가. 1931년 봄 결혼 10여 년만에 이혼 당한 그녀는 거리로 쫓겨난 부당함을 고발하였으나 당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녀는 사회의 냉대를 피해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그녀는 1934년 친구인 김일엽을 찾아와 수덕사 아래의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일찍이 신여성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여인은 찻잔을 놓고 마주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이 한없이 버거운 이혼녀요, 또 한 사람은 그것조차 초월한 여승이었다. 대화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나혜석은 머리를 깎고 싶어 만공 스님을 만나 빌었으나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로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지 않고 5년간 수덕여관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거나 찾아오는 예술가를 만나며 소일했다. 이때 또 다른 인물,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1904-1989)가 등장한다. 예산이 고향이던 미술 청년 이응로는 선배 화가 나혜석을 만나기 위해 수덕여관을 자주 찾아오곤 했다. 1944년 나혜석이 수덕여관을 떠나자 그는 아예 수덕여관을 인수해 이곳서 작품 활동을 한다. 그사이 나혜석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잠시 머물렀지만, 마곡사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와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안양양로원을 거쳐 청운양로원에 기거했다. 그러다 결국 길거리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1948년 12월10일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일찍 피어난 매화의 처참한 마지막이었다. 10년 뒤인 1958년, 이응로는 20년 연하의 여제자와 함께 그림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이때 홀로 남은 부인은 조용히 수덕여관을 지키며 고암을 기다렸다. 고암의 귀국은 뜻밖의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많은 지식인, 예술인, 대학생들이 간첩협의를 썼던 이른바 1967년의 동백림사건으로, 국내로 강제 연행된 이응로는 2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며 옥살이를 했다. 고암은 출옥 후 수덕여관에 머무르다 바위에 추상 그림을 남기고 독일로 훌쩍 떠나버린다. 이후 유럽에서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고암은 가슴 부푼 귀국전시를 앞두고 1989년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그리고 고암이 떠난 후에도 본 부인은 수덕여관을 변함없이 지키다 2001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수덕사 일주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사연이 너무 길었나 보다. 이젠 쓸쓸한 기운만 감도는 여관을 나서면 다행이 일주문은 코앞이다. 금강문, 사천왕문, 황하정루를 차례로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 대웅전(국보 제49호) 앞마당에 선다.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꼽히는 수덕사 대웅전은 세 건물 중 유일하게 건립연도(1308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건물이다. 고려시대 건물이지만 건축 수법이 부드럽고 세련된 미학을 보여주는 백제계 양식이니 석탑이나 무열왕릉의 부장품 등을 제외하고는 현존하는 유산 중에서 백제의 미학을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건물인 셈이다. 무엇보다 목조건물이 7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재료구성 기법이 탄탄한 덕이다. 물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내포지방에 외적의 말발굽이 지나치지 못한 지리적인 요인도 크다. 건축 전문가들은 수덕사 대웅전을 볼 때 다음과 같은 감상 포인트를 제시한다. 첫째가 절제미(節制美)다. 이 건물이 장식을 하지 않고도 얼마나 세련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라는 것이다. 우선 기둥은 건물이 복잡하지 않고 단아한 인상을 주는 주심포식이고, 지붕 앞면과 뒷면이 단순히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은 경건한 느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 단청이 거의 없는 담백한 목재의 질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아 시원한 느낌의 창살, 그리고 목조를 짜 맞추는 구조 수법의 탄탄함 등도 절제미가 잘 살아있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소꼬리 모양의 우리량은 백미로 꼽는다. 두 번째는 비례미(比例美). 수덕사 대웅전은 기둥 간격이 넓어 건물이 답답하지 않고 개방적이다. 기둥의 높이와 지붕 크기의 비례는 지붕에 짓눌린 인상이 아니라 날아갈 듯 사뿐히 올린 느낌을 준다. 처마의 돌출 길이도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긴데, 날렵한 백제 건축비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특히 대웅전 옆면은 황금비례 그 자체다. 많은 이들은 수덕사 대웅전을 들렀다 환희대와 견성암을 기웃거리곤 잰걸음으로 수덕사를 빠져나가지만. 덕숭산 산길을 절대 놓칠 수 없다. 대웅전 왼쪽 관음바위쪽으로 이어진 산길은 돌로 잘 다듬어놓은 계단길이다. 가파르지 않고 그렇다고 완만하지도 않아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돌계단은 모두 1,080개. 108번뇌를 5번쯤 내려놓으면 호젓한 오솔길 오른쪽으로 초가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만공 선사가 참선을 위해 거처하던 소림초당이다. 이어 만나는 향운각 옆에는 만공 스님이 세웠다는 7.5m의 거대한 관음불입상이 있다. 여기서 다시 산길을 걷다 남아있는 108번뇌를 연거푸 지워버리면 스님들의 참선도량인 정혜사(定慧寺)가 반긴다. 정혜사의 널찍한 앞마당은 덕숭산에서 제일의 조망터다. 먼발치로 수덕사 전경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멀리 해미읍내가 아련하다. 저 유명한 영주 부석사에 안양루가 있다면, 수덕사에는 정혜사가 있다. 부석사에서는 영남으로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의 첩첩 산줄기를 품에 안을 수 있다면, 여기서는 금북정맥 주변으로 펼쳐진 내포지방의 널찍한 평야를 두 눈에 담을 수 있다. 마침 앉아있기 좋은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도 있으니 엉덩이가 한없이 무겁다. 수덕사 아래의 덕산(德山)은 지구유(地球乳)라고 불리는 오래된 온천수로 잘 알려진 고을이다. 예산 기행에서 시간 여유가 있다면 한번쯤 이 뜨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가야 하겠지만, 설혹 이런 여유를 즐기지 못하더라도 절대 빼놓지 않고 만나 뵈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다. 매헌은 1930년 3월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란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라 32년 4월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전투 승리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바로 4·29의거다. 당시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와 일본의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리카와 대장 등을 살해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에우다 주중공사 시게미스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그해 12월19일 25세의 나이로 짧고 의로운 생을 마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