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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을 찾아서

담양 식영정에서 (2)

 

 

   식영정에서 (2)

 

 

 

 

 

나는 석천과 송강의  시 중에서 ‘벽오양월’과 ‘선유동’에 대하여 감상한다. 이 두 시는 석천과 송강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먼저  벽오양월(벽오동 나무에 비치는 서늘한 달)에 대하여 살펴본다. 



(1)


가을 산이 시원한 달을 토해 내어

한 밤중에 뜰에 서 있는  벽오동나무에 걸렸네.

봉황은 어느 때에나 오려는가.

나는 지금 천명이 다해가는데.


 碧梧凉月


秋山吐凉月    中夜掛庭梧

鳳鳥何時至    吾今命矣夫



(2)


 선생의 마음은 봉황을  품었는데

 달은  벽오동나무 가지 끝에 걸렸구나.

 백발이 가을 거울 속에 가득하니

 쇠잔한 얼굴은 이제 대장부가 아니구나.

  

 碧梧凉月 


 人懷五色羽    月掛一枝梧 

 白髮滿秋鏡    衰容非壯夫   



(1)의 시는 석천이 쓴 것이오. (2)는 송강의 시이다.

두 시 모두 벽오동나무에  봉황새는 단골메뉴이다.


이 시를 석천이 식영정이 지어진 해인 1560년에 썼다면 그의 나이 65세이다. 석천은 이런 심정으로 이 시를 썼을 것이다. “ 한밤중에 벽오동나무에 걸려 있는 가을 달을 보니 내가  살날은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봉황은 어느 때 에 오시려나. 성군은 아직 오지 않는다. 태평성대를 이끌 임금이여, 나 살아 있을 때 오소서.”



 한편 25살의 송강은 이 석천의 시에 화답하여 이런 생각으로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선생께서는 마음은 아직도 봉황을 품었는데 성성한 백발이 가을 거울 속에 가득합니다. 비록 얼굴은 쇠잔하시나 마음은 봉황을 기다리는 마음이시니 아직도 청춘이십니다. 존경합니다. 오래사세요. 선생님.”


다음은 신선들이 사는 동네라는 선유동에 관한 시를 감상하여 본다.


먼저 석천의 시이다. 


선유동


 창계 시내로 이어진 동천(洞天)은

 밝은 달 맑은 바람 속이로구나.

 때마침 깃털 옷을 입은 늙은이는

 어느  도사인지 알 수가 없네.


 仙遊洞


  蒼溪小洞天 明月淸風裏

  時下羽衣翁 不知何道士


  “신선이 유람하는 동천은 청풍명월 속인데 거기에 깃털 입은 노인이 있다. 누구일까. 나일까? 알 수가 없네. “ 이것이 석천의 마음이었으리라.



한편 송강의 선유동 시를  살펴본다.


그 어느 해에 바다위의 신선이

구름 서린 산속에 깃들었던고.

남긴 자취 어루만지며  슬퍼하노라.

어느덧 머리 하얀 문하의 제자가.


何年海上仙  樓此雲山襄

怊장撫遺踪  白頭門下士


그 어느 해에 바닷가의 신선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구름 산에서 누워 있다. 그 신선의 유품과 자취를 어루만지면서 이제는 머리하얀 제자가 슬퍼한다. 그런데 송강집에는 ‘해상선 海上仙은 하서를 말한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 해상선이 하서라고 보기에는 어색함이 있다. 바닷가의 신선이라면 바닷가에 산 사람이어야 하는 데 하서가 산 곳은 산중인 장성이다. 나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자료를 다시 찾은 결과 김성원의 <서하당유고>에 ‘해상선은 석천을 말한다.’고 표현되어 있다. 석천이 해남출신이고 마지막 생을 마친 곳도 해남이며, 해남은 남쪽 바닷가임을 감안할 때 이 시의 신선은 석천 임억령이 틀림없다. 더구나 식영정 20수는 석천과 송강, 서하당, 제봉이 서로 화답하는 시이므로 하서가 등장하는 것도 어색하다. 그리고 이 시는 세상을 떠난 석천를 기리는 의미도 있다. 머리 하얀 제자는 바로 송강 자신을 가리키며 이 글로 보아 송강이 아마 40대 이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송강이 40살이면 1575년이다. 이 때면 석천이 죽은 지 7년이 되는 해이다.) 


제2단락


성산별곡비에서



한편 식영정 뒤편에는 <성산별곡> 비가 세워져 있다. 비가 엄청 크게 만들어져서 그 옆의 낙락장송이 오히려 기가 죽어 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 비를 ‘사람이 만들어낸 식영정의 날벼락’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산별곡은  송강이 서하당 김성원의 유유자적한 생활(즉 독서 취흥 거문고 타기의 풍류)을 노래하면서,  성산의 아름다움과 춘하추동 4계절 경치의 변화를 적은 가사이다. 이  가사는  강호 은일 가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송강 자신은 길손으로 나온다. 이 성산별곡의 제작 시기는  송강이 25세 때, 41세에서 44세 사이, 50세 이후로 나뉘어져 있으나  송강이  두 번째 창평 낙향 시절인 41세에서 44세 사이가 맞는 것 같다.


한편 이  가사는 이른바 '성산의 사선(四仙)'으로 일컬어졌던 임억령, 고경명, 김성원, 정철이 차례로 제작한 한시 <식영정 이십 영>을  근간으로 하였다 하며  송강보다 앞서  면앙정  송순이 지은 가사 <면앙정가>를 상당히 패러디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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