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
- 담양 식영정에서
이제 수십 개의 돌계단을 올라서 식영정으로 간다. 올라가는 계단 주변에는 소나무가 울창하다. 식영정(息影亭)에 올라서 나는 가장 먼저 식영정 주변을 둘러본다. 앞에는 광주호가 보인다. 창계천에서 광주호로 강물이 흐르고 있다. 뒤에는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가 있고, 그 건너로 무등산이 보인다. 정자는 원래 앞이 툭 트이고 뒤에 산이 있는 곳에 짓는 것이 제격이라는 데 식영정은 바로 그런 곳에 위치하여 있다.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1560년에 지었다는 정자이다. 석천 임억령(1496-1568)은 호남의 사종(詞宗:시문에 뛰어난 대가)으로 불리는 사람으로서 해남출신이다. 그는 눌재 박상의 제자로서 21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30살인 1525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1545년)때 그는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임백령이 윤원형 일파가 되어 윤임등 대윤의 선비와 사림들을 추방하는 횡포등을 보고 자책감을 느껴 벼슬을 사퇴하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임백령은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 (2001. 2월-2002.7월 방영)에서 기생 옥매향을 사이에 두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사랑싸움을 벌인 사람이다. 야사에 의하면 임백령은 윤임이 그의 정인(情人) 옥매향을 소실로 삼은 것에 울분을 느껴 을사사화 때 윤임에게 복수를 했다 한다.
임억령은 동생 임백령이 을사사화직후에 은전을 제안하였으나 사양을 하고 형제간의 절의도 끊은 지조 있는 선비였다. 한편 그는 명종 때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 강원도 관찰사, 담양부사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가 담양부사를 한 것은 그의 나이 62살인 1557년이다. 석천은 담양부사를 한 3년 후인 1560년에 사직을 하고 이 곳 식영정에서 자연을 벗 삼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이후 그는 고향 해남에 내려가서 72세로 그의 생을 마친다.)
이때 식영정을 다닌 인물로는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옹 양산보,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1533-1592), 옥봉 백광훈등이었는데 , 호남가단의 한 맥인 식영정 가단을 형성하였다. 특히 석천과 서하당, 송강, 제봉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고 불렀다. (제봉 고경명은 광주 출신으로서 26세인 명종13년 (1558)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사헌부지평 순창군수, 승문원 판교 등을 거쳐 59세로 동래부사직에서 물러날 때 까지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나서 금산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한편 송강은 이 기간(1557-1562) 중에 서하당 김성원의 장인이고 그의 스승 김윤제의 친구인 석천 임억령으로부터 다양하고 화려하며 낭만적인 한시의 시풍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정면2칸 측면 2칸인 팔각집 식영정은 방이 하나 있고 널찍한 마루가 있다. 마루는 두 군데로 되어 있다. 나는 식영정 건물 앞에서 송강의 식영정 시를 읊는다.
식영정 운에 차하다
숨어사는 사람(幽人)이 세상을 피하여
산정에 외로운 정자를 세웠구나.
아침엔 주역을 보아 진퇴를 정하고
저녁엔 별을 보아 갠 날과 흐린 날을 아네.
이끼 무늬는 해 묵은 벽을 오르고
솔방울은 빈 뜰에 떨어지네.
이웃에 거문고 가진 객이 있어
때때로 대사립을 두들기나니.
次息影亭韻
幽人如避世 山頂起孤亭
進退朝看易 陰晴夜見星
苔紋上古壁 松子落空庭
隣有携琴客 時時叩竹扃
이 시에서 숨어사는 사람(幽人) 서하당 김성원이 식영정을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식영정은 정면2칸 측면 2칸인 팔각집으로서 방이 하나 있고 널찍한 마루가 있는데 마루는 두 군데로 되어 있다. 나는 신발을 벗고서 정자 마루에 오른다. 마루 위 벽에는 여러 개의 편액이 붙어 있다. 한 쪽 마루 벽 위에는 식영정(息影亭)이라고 써진 전서 글씨와 석천 임억령의 <식영정기>와 식영정 20영 한시 편액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송강의 식영정 잡영 10수 한시도 붙어있다. 다른 쪽 마루 벽에는 고경명과 김성원의 식영정 20영 한시 편액이 있다.
나는 먼저 석천 임억령이 쓴 <식영정기>를 본다. 식영정기는 정자이름을 식영정으로 지은 내역을 적은 글이다. 여기에는 서하당과 석천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가 적혀 있다. “金君剛叔吾友也 乃於蒼溪之上寒松之下 得一麓構小亭 柱其隅空其中 以白茅翼以凉 望之如羽盖畵舫 以爲吾休息之所 請名於先生先生曰 ” 로 시작되는 이 식영정기를 자세히 살펴본다.
김군 강숙(剛叔;서하당을 지은 金成遠의 자)은 나의 친구이다. 창계의 위 쪽 우거진 솔숲 아래의 한 기슭을 얻어,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다. 사방 모퉁이에 기둥을 세웠으니 그 안은 공간이다. 흰 띠로 지붕을 잇고, 처마가 번쩍 들려 보기에도 시원하다. 멀리서 보기에는 새 깃으로 양산(陽傘)을 만들어 덮은 꽃배와 같은데, 이 정자를 나에게 휴식할 곳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숙이 정자 이름을 지어 주기를 나에게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장주(莊周 ; 장자의 이름)의 말을 들은 일이 있는가? 장주가 말하기를,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 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사람이 빨리 달아나면 빨리 쫓아오고, 천천히 달아나면 천천히 쫓아와서 끝끝내 뒤만 쫓아다니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너무나 다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문득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 본형을 따라 다니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꾸부리면 저도 꾸부리고 사람이 쳐다보면 그림자도 쳐다본다. 그뿐이랴, 사람의 행동에 따라 그림자도 똑같이 행동한다. 그늘진 데나 밤에는 사라지고, 밝은 데나 낮이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처신하는 것도 이 이치와 똑같은 것이다. 옛말에 꿈에 본 환상과 물에 비친 그림자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정말 덧없고 무상한 것이 인생이다. 사람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겨났으므로 조물주가 사람을 희롱하는 것이 어찌 본형과 그림자의 관계에만 국한하겠는가?
그림자가 천 번 바뀐다고 치자. 이것은 본형의 바뀜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활 철학이 천 번 바뀌었다고 치자. 이것도 자연 법칙의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언제나 자연 법칙에 따라 충실하게 행동할 뿐, 자연 법칙 자체에 간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아침에 부자이던 사람이 저녁에 가난뱅이가 될 수도 있고, 옛날에 귀하던 사람이 지금은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은 모두 조화옹이 풀무질을 하여 만들어낸 일인 것이다. (중략) 이것이 모두 조화옹이 나를 놀리고 있지만, 내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지낼 뿐이다. 그러는 처지에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슬퍼하고 성내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강숙이 말하기를 사람과 그림자의 관계는 그렇다고 칩시다. 그것이야 자연의 법칙이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선생의 경우는 굴신이 모두 자신이 선택하였을 뿐, 세상에서 버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중략) 선생이 이에 응답하기를, 순리로 흐르면 앞으로 나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머물러 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도 꼭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시원하게 바람을 타고, 조화옹과 함께 어울리어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다. 내가 죽치고 그림자를 없애고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으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하고 우러러보지도 못할 것이니, 그러니 ‘그림자가 쉬고 있다’는 뜻의 식영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강숙이 말하기를, ‘이제야 비로소 선생의 뜻을 알겠습니다. 청하옵나니 그 말씀을 바탕으로 기 記를 써 주십시오.’ 하므로 그 청에 응하였다.
계해 7월 일 하의고인 임억령이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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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식영정)란 이름은 단지 서정적인 뜻뿐만 아니라 엄청나고 호방하고 무애한 경지를 가리키는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이 정자 이름에는 은둔과 조화와 순리의 동양사상이 담겨 있다.
다음에 나는 석천의 <식영정 20영> 현판과 송강의 <식영정 잡영10수> 편액을 자세히 본다. 식영정 20영은 식영정과 성산 근처의 이름난 것 20가지 풍광을 시로 쓴 것이다. 그것은 서석한운(瑞石閑雲),창계백파(蒼溪白波), 벽오양월(碧梧凉月), 조대쌍송(釣臺雙松), 환벽영추(環碧靈湫), 노자암(鰲伸巖) 자미탄(紫薇灘) 도화경(桃花徑), 부용당(芙蓉塘), 선유동(仙遊洞)등 20개로서 석천이 가장 먼저 시를 쓰고 서하당, 제봉, 송강이 그 시를 차운하여 모두 60수를 지어 도합 80수가 전해진다.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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