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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 가고시마 기행(3) 사쓰에이 전쟁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 가고시마 기행(3)  사쓰에이 전쟁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6.04.15 09:35
  • 수정 2026.04.1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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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여행칼럼니스트)

# 2025년 12월 18일 9시20분부터 1시간 동안 기리시마 신궁을 구경하였다. 본전을 보고 나서 병오년 개운(開運)을 기원하는 부적을 500엔 주고 샀다. 

기리시마 신궁 전경. 사진=김세곤 제공
신궁 본전. 사진=김세곤 제공
필자가 산 부적. 사진=김세곤 제공

이어서 신락전(神樂殿)을 둘러 보았다. 신락전은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기 위하여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800년 된 산신목(山神木)도 보았다.

산신목. 사진=김세곤 제공

이제 기리시마 신궁을 내려온다. 내려오면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가 섬에서 숨어 지낼 때의 일본 정국에 대하여 살펴본다.   

# 1860년 3월 3일, 사쿠라다몬(櫻田門) 사건으로 막부의 로주(수상)    이이 나오스케가 피살되자 막부의 권위는 무너졌고, 강경책은 좌절되었다. 이러자 막부는 막부파 안도 노부마사를 수석 로주로, 반막부파 구제 히로치카를 로주로 임명하여 화합을 꾀하려고 하였다. 즉 교토의 조정과 에도 막부의 화합을 꾀하는 공무합체(公武合體) 운동을 추진했다. 

그런 상징으로 막부는 고메이 천황의 이복여동생 가즈노미야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결혼을 추진하였다. 1860년 10월에 천황은 칙허를 하였고, 1861년 10월에는 가즈노미야가 결혼을 준비하기 위하여 에도로 갔다. 결혼식은 1862년 2월에 거행하기로 예정되었다.

 

하지만  운동은 급진적 존왕양이파의 반감을 샀다. 1862년 1월에   미토번 출신 사무라이들이 사카시다몬 밖에서 수석 로주 안도 노부마사를 습격하였다. 노부마사는 부상에 그쳤지만 사직하였고, 공무합체운동은 주춤하였다.  

이무렵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 1840∽1897)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 1817∽1887)가 병력 1천 명을 이끌고 교토로 항하였다. 히사미쓰는 조정에 쇼군의 상경, 웅번 번주의 막부 정치 참여 등을 골자로 한 정치개혁안을 제시하여 천황의 칙서를 받았다.  

7월에 히사미쓰는 천황의 칙서를 가지고 에도로 가서 막부개혁을 요구하였다. 막부는 히사미쓰의 개혁안을 수용했다. 막부는 정치 현안을 웅번의 번주와 협의하기로 하였고, 참근교대제도를 3년에 1회로 하고 번주가 에도에 머무는 기간도 단축하였다. 또한 교토에는 교토수호직을 신설하고 그 자리에 아이즈번 번주가 임명되었다. 교토수호직의 주요 임무는 막부 저항 세력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 나마무기 사건  

1862년 9월 14일에 시마즈 히사미쓰와 700명의 무사들이 요코하마   나마무기(生麦) 마을에 이르고 있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도 히사미쓰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에도에 갔다가 귀환 중이었다. 그런데 말 탄 영국인 4명(1명은 부인)이 히사미쓰 행렬에 난입하였다. 이러자 히사미쓰의 가마를 호위하던 무사가 ‘무례하다’며 칼로 베었다. 

영국인 4명 중 1명이 사망하였고, 2명은 중상을 입었는데, 다행히 부인이 다치지 않아 요코하마 거류지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했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요코하마 시내를 들끓게 하였다. 요코하마 거주지의 각국 상인들이 집회를 열고 히사미쓰를 처벌하라고 주장하였지만, 영국 대리공사 닐은 소요를 진정시켰다. 

1863년 2월 19일, 영국대리공사 닐은 막부에 사죄와 배상 10만 파운드를 요구했고, 사쓰마번에는 범인의 처벌과 손해배상금 2만 5천 파운드를 요구하였다. 

닐 대리공사는 무력 행사로 12척의 군함을 요코하마에 집결시켰다. 막부는 이에 굴복하여 5월 9일에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사태를 수습하였다.  

# 시모노세키 전쟁  

1862년 11월 고메이 천황은 서양오랑캐(양이 洋夷)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막부에 내렸다. 막부는 크게 당황했다. 1863년 봄에 쇼군이 직접   교토를 방문하였다. 천황은 쇼군에게 양이를 거듭 촉구했다. 궁지에 몰린 쇼군은 5월10일에 양이를 결행토록 각 번에 명령하였다. 

바로 그날(5월 10일)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는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했다. 23일에는 프랑스 군함, 26일에는 네델란드 군함을 포격하였다. 이러자 6월 1일에 미국 군함은 조슈번 군함 2척을 격침시켰고, 6월 5일에 프랑스 군함의 육전대는 마에다촌을 전소시켰다.   

# 사쓰에이 전쟁

1863년 6월 27일에 영국 대리공사 닐을 태운 군함 7척이 가고시마 만에 들어왔다. 닐 대리공사는 나마무기 사건의 하수인 처벌과 배상금 지급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고시마 번주는 하수인들은 행방불명이고 배상금은  막부와 상의하여 처리하겠다고 회답하였다. 

7월 2일에 영국은 정박한 사쓰마번 증기선 3척을 나포했다. 사쓰마번도 영국 함대를 포격하면서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군은 사쓰마  군대의 포에 맞아 13명이 전사하고 군함 3척이 파손되었다. 이러자 영국은 110파운드 암스트롱 포를 포격하여 가고시마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결국 전쟁은 사쓰마 번이 2만 5천 파운드 배상금을 지불하며  일단락됐다. 

여담이지만 1905년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가 사쓰마의  해안포대 병사로 참전했었고, 오쿠보 도시미치도 참전했다. 반면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섬에 유배중이어서 참전하지 못했다.

사쓰에이 전쟁 책자(가고시마 집성관 오리엔테이션 센터 소장). 사진=김세곤 제공

이 전쟁으로 사쓰마 번은 함포 성능의 차이를 실감하고, 양이에서 개방으로 선회했다. 영국으로부터 군함과 무기를 구입하였고, 1864년에 서양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개성소(開成所)를 개설하였으며, 1865년에는 해외 진출을 금지한 막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청년 19명을 영국으로 유학 보냈다. 1867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증기기관을 들여와 증기선을 만들기 위한 부품을 만드는 서양식 공장인     ‘집성관(集成館) 기계공장’과 방적소(紡績所)를 설립하고, 서양의 기술을 지도하는 영국인 기술자들이 머무는 숙소 ‘이인관(異人館)’도 지었다.

(참고문헌)
o 구태훈 지음, 일본제국, 일어나다, 재팬리서치21, 2010
o 김희영 지음, 이야기 일본사, 청아출판사, 2006
o 연민수 편저, 일본 역사, 보고사, 2009 
o 이노우에 가쓰오 지음· 이원우 옮김, 막말 · 유신, 어문학사, 2013
o 정혜선 지음,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