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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 가고시마 기행(1) 사이고 다카모리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 가고시마 기행(1) 사이고 다카모리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6.03.1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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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2025년 12월 17일부터 12월 20일까지 3박 4일간 패키지 여행으로 일본 가고시마를 다녀왔다. 가고시마는 우리나라의 해남 같은 일본  최남단 땅끝 동네이다.  

필자가 가고시마를 가야 할 이유는 가고시마(옛 지명 사쓰마)의 역사를 자세히 알고자 함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장인 시마즈 요시히로(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싸운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가 남원에서 포로로 끌고 간 도공 심당길의 후손인 심수관, 메이지 시대의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도고 헤이하치로 등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시마즈 요시히로 초상화(가고시마 센칸엔 집성관 소장). 사진=김세곤 제공

12월 17일 오후 3시 반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5시반에 가고시마 공항에 도착 이후 곧바로 ‘호텔 기리시마 캐슬’에 여장을 풀었다, 상당히 늦은 저녁을 뷔페로 배부르게 먹고 넓은 방에서 잠을 잤다. 

가고시마 지도. 사진=김세곤 제공

18일 아침 일찍 대욕장에서 목욕을 한 후에 방에서 녹차를 마셨다. 녹차 옆에는 쿠키 두 개가 있었는데, 쿠키 봉지에 사이고  다카모리 얼굴이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죽마고우인 오쿠보 도시미치(1830∽1878),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의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메이지 ‘유신(維新)   3걸(傑)’로 꼽히는 인물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얼굴이 그려진 과자 포장지(번역문) . 사진=김세곤 제공

기리시마 신궁을 답사하기 위하여 관광버스가 출발하려는데 몇 사람이 아직 버스를 안 탔다. 이 틈을 이용하여 호텔 입구를 사진 찍었는데,  입구 환영 입간판에 사이고 다카모리 얼굴이 또 있다.

 
호텔입구 입간판. 사진=김세곤 제공
입간판 번역문. 사진=김세곤 제공

그러면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의 일생을 살펴보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8년에 가고시마 가지야 정(町)에서 가난한 하급 무사였던 사이고 기치베 다카모리(西郷吉兵衛隆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남 3녀중 장남인 사이고는 동생들을 챙기면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어린 시절부터 체구가 크고 동작이 느리고 얌전한 성격이어서 또래들은 그를 ‘얼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는 183cm의 키에 90kg의 거구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였다.     

18세에 사이고는 사쓰마 번의 농정관리로 임용되어 농촌을 순회하며  마을 관리들을 지도감독하였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54년에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1809~1858)가 그를 발탁한 것이다.  

나리아키라는 시마즈 가문의 제28대 당주이자 사쓰마 번의 제11대 번주인데, 개명번주로서 서양 학문과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영어도 할 줄 알아서 일기를 쓰면서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일본 발음을 알파벳으로 썼다. 

그는 센칸엔 곁에 근대식 공업단지를 조성했다 여기에는 용광로, 대포, 가마솥, 유리, 도검, 농기구, 피혁 등의 제조소를 만들어 집성관(集成館)이라고 이름지었다.  

또한 조선소를 세워 증기선을 건조하였고, 1854년에는 서양식 군함 ‘쇼헤이 마루’를 진수하였다. 그는 이 군함을 에도 막부에 헌상하면서 서양배처럼 마스트 중앙에 깃발을 올려야 한다며 내건 것이 일장기(日章旗)의 효시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증기기관선 제1호 ‘운코마루(雲行丸)호’를 건조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 동상(센칸엔 집성관) . 사진=김세곤 제공

한편 번주 나리아키라는 사이고 다카모리 외에 오쿠보 도시미치도 발탁하였다. 1830년 사쓰마 번의 중급 무사 오쿠보 도시요의 1남4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오쿠보는 아버지는 양명학, 할아버지는 명망있는 난학자 (네델란드학문)이어서 서양문물과 학문에 밝았다. 

어린 시절에는 3살 위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동문수학하였고, 17세인 1847년부터 사쓰마 번 서기로 일하였다. 

그런데 1849년 12월에 ‘오유라 소동’이 일어났다. 보수적인 번주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 1791-1859)가 정실에서 태어난 개혁파 장남 나리아키라를 제치고, 애첩 오유라 소생인 5남 히사미쓰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나리아키라를 지지하는 개혁파가 들고 일어났다. 

1849년 12월 3일, 번주 나리오키는 나리아키라파 무사들을 체포하여 할복을 명하였으며 50명의 무사들을 유배시켰다. 이러자 나리아키라파인 오쿠보 아버지는 유배되었고 오쿠보도 면직되었다. 

한편 나리오키의 체포 명령에서 달아난 나리아키라파의 몇몇 무사들은 후쿠오카 번으로 탈주하여 나리아키라와 친척인 번주 쿠로다 나가히로(黒田長溥)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나가히로는 에도의 실세 아베 마사 히로에게 사태의 수습을 호소하였다. 나리아키라를 이전부터 지지했던 아베 마사히로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시마즈 나리오키를 은거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쇼군 이에요시는 나리오키에게 다기(茶器)를 내리며 은거를 촉구하였다. (다기를 내리는 것은 은거하고 차를 마시면서 즐기라는 뜻이다.)

쇼군의 명(命)을 거절할 수 없는 나리오키는 결국 1851년 3월 4일 나리아키라에게 번주를 넘겨주고 은거하였다. 

나리아키라가 번주가 되자 오쿠보 도시미치는  즉시 복직되었다.  

(참고문헌)
o 영은경 엮음,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2
o 조지 무쇼 편저 전성영 옮김,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다산초당, 2021
o 유홍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I 규슈, 창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