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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 가고시마 기행(2)-사이고 다카모리(2)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 가고시마 기행(2)-사이고 다카모리(2)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6.03.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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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2025년 12월 18일 09시, 기리시마 신궁으로 가는 버스에서 ‘일본의 개국(開國)과 막부의 쇼군 후계자 싸움’을 공부한다.     

「1854년에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는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  아키라(1809~1858)가 참근교대(參勤交代, 번주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에도에 일정기간 머무르게 하는 제도)로 에도에 갈 때 나리아키라를 수행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854년 3월 31일에 미국 페리 제독과 에도 막부는 ‘미일(美日) 화친조약‘을 맺었다. 시모다(시즈오카현 남동부)와 하코다테(북해도 남단)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영사의 주재 인정, 최혜국 대우를 인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로써 200년에 걸친 일본의 쇄국은 막을 내렸다. 

그러면 ’미일화친조약(일명 가나자와 조약)’ 경과를 살펴보자. 

1853년 7월 8일, 미국 동인도 사령관 페리 제독은 네 척의 군함(일명 ‘흑선(黑船)’)을 이끌고 에도만 입구 우라가에 나타났다. 포함외교(砲艦 外交)를 통해 일본 항구를 개방시키기 위함이었다. 페리는 외국과의   접촉을 위해 지정된 항구였던 나가사키로 이동하라는 막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에도로 직접 진군해 에도를 불태워버리겠다고 위협한 후, 7월 14일에 구리하마에 상륙해 필모어 대통령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막부는 페리의 강경한 태도에 굴복하여 이듬해에 회담하기로 약속하였다. 다음해인 1854년 2월 11일에 미국 페리 제독이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에도만 가나자와에 다시 나타났다.

페리는 무력 사용을 암시하고, 지정된 협상 장소에서 만남을 거부하는 등 철저히 상황을 미국에 유리하게 이끌었다. 막부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에 들어갔다. 협상은 3월 8일에 시작되어 3월 31일에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페리 함대에 굴복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반막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물리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더구나 고메이 천황의 조약 반대는 막부를 전복하려는 토막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막부를 중심으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번주도 있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대표적 인물인데, 1856년에 그는 양녀 아쓰히메를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세번째 정실 부인으로 결혼시켰다. 일설에 의하면 사이고가 혼수품 마련에 일조하였단다. 

가고시마 성터의 아쓰히메 상(像). 사진=김세곤 제공
아쓰히메 상 뒷면의 설명문. 사진=김세곤 제공

한편 1856년에 시모다에 부임한 해리스 미국 총영사는 막부에 통상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막부는 안절부절하였다. 더구나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병약하여 후계자를 둘 가능성이 없어 후계자 논쟁이 일어났다. 

 미토 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1800-1860)는 아들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밀었고, 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스케와  쇼군 이에사다의 친모 오미츠노카타는 도쿠가와 요시토미(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밀었다.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밀었는데, 사이고는 나리아키라의 뜻에 따라 각 번주 간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남편마저 떠난 고향 가고시마에서 홀로 동생들을 책임지며 살아해야 했던 아내 도시코가 궁핍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하였다. 

사이고는 이혼이라는 개인적인 아픔 속에서도 에도와 가고시마, 교토를 오가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추대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1858년 4월 23일 반개혁파인 이이 나오스케가 대로(大老)로 임명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밀었던 개혁파는 크게 실망하였다.   

6월 10일에 이이 니오스케는 천황의 칙허도 받지 않고 미국 총영사 해리스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요코하마 · 나가사키 등 4개항구를 추가로 개방하고 치외법권을 허용하였다. 이러자 고메이 천황은 매우 분노하였다.     

하지만 6월 25일에 나오스케는 쇼군 이에사다를 압박하여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차기 쇼군으로 만들었다.  

쇼군 이에사다가 죽기 하루 전인 7월 5일에 나오스케는 쇼군 이에사다의 칙령을 빌어 도쿠가와 나리아키, 히토츠바시 요시노부 등에게 은거와 근신을 명령하였다.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의 시작이었다.   

나오스케가 멋대로 후계자를 정했다는 소식이 사쓰마에 전달되자 나리 아키라는 병사 5천 명과 함께 에도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7월 8일에 콜레라로 갑자기 쓰러져 7월 16일에 급사하였다.  

이후 나오시케는 1859년까지 개혁파(반막부파) 100여 명을 숙청하였는데, 조슈번의 요시다 쇼인(1830∽1859)도 처형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도 마찬가지로 처벌 대상이었다. 그는 같이 활동하던 승려 겟쇼와 함께 사쓰마로 도주했다. 그러나 사쓰마 번에 그들을 도와주 지 않자, 두 사람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겟쇼만 사망하고 사이고 살아났다. 사쓰마 번은 그에게 기쿠치 겐고라는 가명을 주어 오시마  (大島)에 숨어 지내도록 했다.

한편 1860년 3월 3일에 사쓰마와 미토번의 낭인들 수십 명이 에도성  사쿠라다몬(櫻田門)에서 나오스케의 행렬에 덤벼들어 삽시간에 나오스케의 목을 날려버렸다.」  

# 9시 20분에 기리시마 신궁에 도착하였다. 

기리시마 신궁은 천손강림을 이룬 신(神)인 ‘니니기노 미코토’를 모시고 있다. 미코토는 일본 건국 신화에 나오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다. 신궁은 540년에 창건되었으나 화재로 1715년에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타카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202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기리시마 신궁 안내도. 사진=김세곤 제공
기리시마 신궁 입구. 사진=김세곤 제공

(참고문헌)
o 김희영 지음, 이야기 일본사, 청아출판사, 2006
o 염은경 엮음,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 2012
o 정혜선 지음,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