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9. 적벽에 새긴 도학의 꿈, 신재 최산두 |
입력시간 : 2009. 08.13. 18:24 |
|
애통한 심정, 외로운 삶, 술로 달래다
의정부 사인 벼슬 중 기묘사화 맞아 화순 유배
'조선의 적벽' 이름 짓고 적막강산서 인생 마감
9. 적벽에 새긴 도학의 꿈, 신재 최산두
- 화순 적벽, 물염정, 도원서원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채 안 된 1519년 12월 16일, 능성현에 유배중인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진다. 이 날 한 선비가 동복현(지금의 화순군 동복면)으로 귀양을 오게 된다.
그가 바로 신재 최산두(1483-1536)이다. 그는 광양시 봉강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꿈에 북두칠성의 광채가 백운산에 내렸다하여 이름도 산두(山斗)라 지었다 한다.
순천에서 유배중인 한훤당 김굉필 문하에서 최부의 사위 유계린과 함께 공부를 한 그는 1513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를 하였다. 사람들은 최산두와 윤구 그리고 유계린의 큰 아들 유성춘을 호남 3걸이라 불렀다. 최산두는 조광조, 김식, 김안국, 김정국등과 서울에서 모임을 갖는다. 소위 서울의 군자모임이란 뜻의 낙중군자회(洛中君子會)를 만들어 지치와 도의를 논한다. 그는 홍문관 수찬, 의정부 사인(정4품) 벼슬을 하다가 기묘사화를 맞는다.
동복현 유배지에서 최산두는 해남에서 귀양살이 중인 윤구(1495-1549)에게 시를 보낸다. 윤구는 해남 윤씨 종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이고 고산 윤선도의 증조부이다.
강 길에 봄을 찾는 일이 늦었는데
그대를 생각하여 달 아래를 거니네.
해마다 산 시냇물 구비에서
분수 따라 살아가고 있다오.
江路尋春晩 강로심춘만
思君步月時 사군보월시
年年山澗曲 연연산윤곡
隨分有生涯 수분유생애
‘봄이 왔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늦게야 봄을 찾고, 해 마다 똑같은 산과 시냇물 구비 속에서 담백하게 살면서 한을 삭이네.’ 자신이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장문의 편지 대신 한 편의 시에 담고 있다.
최산두는 스스로를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 불렀다. 나복산은 고려 인삼 시배지라고 일컬어지는데 지금은 모후산(母后山)이라 부른다. ‘어머니 품 속 같은 산’이라는 뜻의 모후산은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동복현은 나복산 아래 분지에 자리 잡은 고을인데 근처에 옹성산, 백아산등이 있어 그야말로 산골짜기 중에 산골짜기이다. 적막강산이란 표현이 적합하다 할까.
신재는 주변 골짜기와 강산을 돌아본다. 지금의 동복 수원지에 펼쳐지는 기암절벽은 정말 장관이다. 비 내린 후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는 더욱 환상적이다. 이 절벽을 보고 신재는 중국 양자강 남안의 적벽(赤壁)을 떠올린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적벽, 조조가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대패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삼국지 적벽대전 전장인 적벽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을 조선의 적벽이라 이름 짓는다. 이외에도 동복에는 적벽이 여러 곳 있다. 물염적벽, 창량적벽등.
|
물염정에서 바라보는 적벽 또한 빼어나다.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티끌 없이 살겠다는 의미의 물염(勿染). 이 물염정에서 신재는 흔적을 남긴다. 아쉽게도 제물염정(題勿染亭) 시는 4구 중 2구만 남아 있다.
백로가 고기 엿보는 모습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고
노란 꾀꼬리 나비 쫒는 모습
산이 황금을 토하는 것 같네
江含白玉窺魚鷺 강함백옥규어로
山吐黃金進蝶鶯 산토황금진접앵
한편 신재는 술로 세월을 보낸다. 세상이 갈수록 썩었으니 술로 세월을 달랠 수 밖에. 술은 세상 근심을 잊게 하는 망우물(忘憂物)이라 했는데 술만 보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실컷 마시고 남기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동복현 사마소(司馬所)에 연회가 있었다. 사마소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젊은 유림들의 자치협의기구인데 간혹 지방 수령의 정사에 간섭을 하기도 하였다. 신재가 먼저 가 보았더니, 다른 진사, 생원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은 것이었다.
속이 뒤틀렸다. 잘 난체 하는 유림들이 꼴 보기 싫었다. 화가 나서 거기 마련해 둔 술을 다 마셔버렸다. 술동이를 지키는 자가 죄를 뒤집어 쓸까봐 두려워하므로, 신재는 감나무 잎에 시를 적어 놓고 자리를 떴다.
뽕밭은 푸르고, 오디는 붉으며 감나무 잎사귀는 어느 새 살쪘구나.
작은 동산에 풍물이 꽃답고 향기롭네.
사마소의 술 단지에 술이 다한 연유를 알고자 하거든
선생이 취하여 돌아가는 모습 속에서 찾아보시게.
桑椹靑紅柹葉肥 상심청홍제엽비
小園風物屬芳菲 소원풍물속방비
欲知司馬樽中盡 욕지사마존중진
請看先生醉後歸 청간선생취후귀
1527년 어느 날, 장성군 맥동마을에 사는 하서 김인후(1510-1560)는 미암 유희춘(1513-1577)과 함께 최산두를 만나러 갔다. 18세의 하서는 평소 술 잘 마신다고 소문난 그를 위해 술을 큰 통으로 한 통 가져갔다. 하서는 열흘간 머물면서 신재 선생에게 굴원의 '초사'를 배웠다. 하서가 신재 선생을 만난 기억을 더듬어 보자.
신재 선생께서 ‘술 남았느냐’고 물었던 말을 기억하면서 두보의 시에 화운하여 경범에게 지어 보이다.
제1수
신재 선생께서 나복현에 유배 와서는
술 남았느냐고 첩에게 물었다네.
떠다니는 세상이라 유난히 느낀 게 많아
석양에도 취한 술 깨지를 않네.
憶神齋問酒和杜陵韻示景范 억신재문주화두릉운시경범
神齋蘿葍縣 신재나복현
問妾酒留甁 문첩주류병
浮世偏多感 부세편다감
斜陽未覺醒 사양미각성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서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세상이다. 세상을 바르게 만들고자 하는 생각은 많지만 유배 신세이니 어찌 하리. 그래서 하루 종일 술만 진탕 마시고 살아가네.
제2수
원릉은 슬프게도 눈이 하얗고
친구들은 멈춘 구름을 보면서 한스러워하네.
적막한 곳을 그 누가 찾아오려나.
나 혼자 깨어 있는 걸 자랑할 마음 없네.
園陵悲雪白 원릉비설백
親友恨雲停 친우한운정
寂寞誰相問 적막수상문
無心詫獨醒 무심타독성
화순 적벽과 같은 산골짜기 적막한 곳에서 살고 있자니 분통만 터진다. 이런 적막강산을 누가 찾아 올 것인가? 세상이 다 흐린데 나만 깨끗하면 무엇 하리. 초나라의 재상 굴원처럼 멱라강에 몸을 던져 죽기라도 해야 하나. 아! 사는 것이 너무나 한스럽다.
이렇듯 최산두의 삶은 굴원의 '초사'나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비슷한 삶이다. 동복현으로 귀양 온 신재는 귀양 온 지 14년 만에 귀양이 풀린다. 귀양이 풀렸어도 그는 이곳에서 살다가 1536년에 생을 마감한다. 하서 김인후는 '제문'에서 신재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외롭다, 귀양살이. 외떨어진 삶, 세상을 잊었다오.
술잔만이 임의 사랑. 읊조리며 노니셨네.'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도원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이 자리는 그가 귀양살이를 하였던 곳이라 한다. 그가 죽은 지 130년 후인 1668년에 신재는 도원사 사당에 배향되었다. 1679년에는 석천 임억령, 한강 정구, 우산 안방준을 같이 추향하였는데, 한강 정구는 동복현감을 한 적이 있고 최산두의 스승 김굉필의 증외손자이기도 하다.
세상을 잘 못 만나 뜻을 펴지도 못하고 술로 세상을 달래다가 한 많은 세상을 마감한 신재 최산두. 그의 호방한 모습과 도학의 꿈은 적벽이란 이름 두 글자에 새겨져 있는 것일까.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segon53@hanmail.net
다음 회는 '닭 모가지가 비틀어져도 새벽은 오네. - 눌재 박상, 윤구·신잠·고운에게 시를 보내다' 입니다.
무등일보 무등일보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면앙 송순 - 담양 면앙정 (0) | 2009.08.31 |
---|---|
양산보 , 대숲에 앉아서 ... -담양 소쇄원 (0) | 2009.08.24 |
기묘사화를 당하여 , 박상의 편지글... (0) | 2009.08.10 |
호남 정신의 뿌리 코드 - 자부심과 연대성 (0) | 2009.08.02 |
벽파를 건너며 = 김정 (0) | 2009.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