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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을 찾아서

식영정 2

 

 

 

제2장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2)


 

  송강 정철은 창평에 낙향할 때 마다 서하당 김성원과 같이 술도 마시고 거문고도 타고 때로는 서하당에서 잠도 같이 잤나 보다. 아래 시들을 음미하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하옹의 운에 차하다


  속세를 피해 숨어 사는 이(幽人)가 문득 일어나 봄 흥을 찾나니   

  석양이 냇물 위의 짧은 다리를 지나네.   

  온갖 나무와 화초들이 저녁 아지랑이 속에 있으니

  시골의 갓 익은 술을 두세 잔 마시네.


次霞翁韻   


幽人忽起尋春興   川上夕陽經短橋      

萬壽芳菲烟景暮   野村新酒兩三瓢   


  이 시는 송강과 서하당이 봄나들이를 가서 술 한 잔 마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서하당은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왔다. 석양의 시골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들어오는 시이다. 두 사람이 같이 나들이 하는 시는 또 있다.


하당장과 더불어 방초주를 거닐다가 서하당으로 돌아와 술을 들다


풀 덥힌 물가(방주芳洲)를 거닐다가 지쳐 돌아와

 꽃 그림자 속에서 다시 술잔을 건네네.

 해마다 남쪽 북쪽에서 서로 그리던 꿈이

 몇 번이나 송대(松臺)에 한밤중 찾아왔던가.

 

 與霞堂丈步屧芳草洲還于霞堂小酌 


散策芳洲倦却廻     殘花影裏更傳杯 

年年南北相思夢     機度松臺夜半來    


  이 시는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푸는 모습이다. 송강은 북쪽 한양에, 서하당은 남쪽 창평에 있으면서 서로 그리면서 꿈에서나 만났는데 다시 술잔을 건네니 참으로 반갑다.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송강은 술꾼이었다. 주선(酒仙)은 못되었지만 주당(酒黨) 이상은 되었다. 술 때문에 실수도 많았고 술을 끊으려고 노력도 해 보았으나 술을 끊지 못하였다. ‘술을 줄이고 말을 삼가라’는 동갑내기 친구 율곡 이이(1536-1584)의 충고를 들을 만큼 술 때문에 정적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근무 중인 대낮부터 술이 취해 사모가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적이 여러 번 있었고, 뒷날 선조가 은잔을 하사하며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씩만 마시라’고 하자 술잔을 두들겨 사발만큼 크게 늘려 마시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잔은 현재 충북 진천의 정송강사에 보관되어 있다 한다.) 그런 만큼 송강은 술에 관한 시와 가사도 많이 썼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성권농 집에 술이 익어>란 시조와 <장진주사>이다.


재너머 성권농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은 소 발로 박차 언치노하 지즐 타며

아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고개 너머 성권농 집에 술이 익었다는 말을 어제 들었다. 말만 들어도 술 맛이 돈다. 누워 있는 소를 발로 걷어 차 일으켜 세우고 깔개만 깔고 눌러 탄다. 그리고 성권농 집 아이에게 벌써 정좌수 왔다고 아뢰라고 소리친다. 이 시의 정좌수는 송강 자신이고 성권농은 송강의 가장 절친한 친구 우계 성혼(1535-1598)으로 알려져 있다.


  또 술에 관한 송강의 시조중 가장 유명한 것이 <장진주사>이다.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 꺾고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당에 만인이 울어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 곳 가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어쩌리.  

 

  이 사설시조야 말로  인생은 무상한 것이니 술이나 마시고 살자는 ‘권주가’임과 동시에 세상살이에 대한 초탈을 적은 시이다. 이 시조와 제목이 비슷한 이태백의 <장진주> 한시가 있다. 그런데 이태백의 시는 호방하고 남성적임에 비하여 송강의 시조는 우수에 젖고 여성적이다. 더구나 어욱새, 속새, 누런 해, 흰 달 , 가는 비, 쇼쇼리(회오리) 바람 등 순수한 우리말로 섬세하게 지어진 이 시조는 그냥 읽으면 감칠맛이 별로 없고,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 비감(悲感)이 난다. 이 노래 가사는 허무한 세상살이와 인생이 끝난 후의 적막, 비탄이 진하게 깔려 있다. 조선후기의 문학 비평가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장진주사는  당나라 이태백(李太白)과 이장길(李長吉)의 술을 권하는 뜻을 본받아 지은 것으로, 노래가 시원하게 나가고 어귀가 처연하고 비애스럽다. 맹상군(孟嘗君)에게 들려준다면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게 옹문(雍門)의 거문고 소리를 들었을 때 이상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한편 송강은 서하당에서 자면서 이런 시를 쓴다.


번곡을 서하당 벽오동에 쓰다.


다락 밖에 벽오동나무가 있건만

봉황새는 어찌 아니 오는가.

무심한 한 조각 달 만이

한밤중에  홀로 서성이누나.


 飜曲題霞堂碧梧  


樓外碧梧樹     鳳兮何不來 

無心一片月     中夜獨徘徊 


  이 시를 풀이하면  ‘벽오동나무가 있건만 봉황새는 아니 온다. 무심한 조각달만 한밤중에 홀로 서성인다.’이다. 봉황새는 상서로운 새이다. 머리는 뱀, 턱은 제비, 등은 거북, 꼬리는 물고기 모양으로 깃은 오색의 무늬가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새이다. 또한 봉황은 임금의 상징이기도 하다.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용과 봉황의 문양을 볼 수 있는데, 이 문양은 임금이 자리하는 곳에 그려져 있다. 어좌의 왼쪽에는 용 문양이 있는데 이는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고,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봉황은 성군의 덕치를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용과 봉황은 임금님 어좌 뿐 만 아니라 광화문 천장에도, 어전의 천장에도 그려져 있다.  한편 봉황은 벽오동 나무에만 앉는다. 그래서 가수 김도향의 노래가사처럼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자드니’ 이다. 나는 이 시에서  임금으로부터 소식을 기다리는 송강의 마음을 읽는다. 지금 송강은 창평에 낙향중이다. 그런데 아직 임금에게서 소식이 없다.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 오시나’이다. 임금께서 부르시면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하고 뛰쳐나갈 것인데.


부용당

 
 


  

  서하당 왼쪽 옆에는 부용당(芙蓉堂)이 있다.

  이 부용당은 1972년에 지어 졌다한다. 방이 하나 있고 마루가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연못이 있다. 석천과 송강은 이 연못을 부용당(芙蓉塘: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 했다. 부용당이라는 연못 이름은 식영정 20영에도 나온다. 그런데 지금 이 연못에는 연꽃이 없다. 


 부용당  마루에는  편액이 하나 걸려 있다. 석천, 서하당, 제봉, 송강이 쓴 부용당 芙蓉塘 한시이다.


먼저 송강의  한시부터 본다.


용이 이 물을 말려버렸다면

 지금 와선 응당 후회하겠지

 연꽃 최고 붉게 활짝 펴니

 거마(車馬)가 앞 시내로 몰리는 것을



 龍若閟玆水         如今應噬臍  

 芙蓉爛紅白         車馬簇前溪


 석천이 쓴 시도 같이 감상한다.


신선 손바닥에 이슬이 엉켜

 청풍에 사향 향기인 양 코를 찌르네.

 시시한 글들은  모두 지워버리고

 잘된 것만 골라서 주렴계에게 보내 볼까? 나만 못할걸.



    白露凝仙掌           淸風動麝臍

    微時可以削           妙語有濂溪


  이제 나는  식영정에 오르기 위하여 돌계단 입구로 간다. 그 근처에는 기념비가 하나 있다.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라고 하는 기념비이다. 이 비는 문화관광부가 1991년 2월을 ‘송강 정철의 달’로 삼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일정씨 문중과 전라남도에서 세운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이 달의 문화인물>같은 기념비이다. 그런데 이 비가 마치  <백억 불  수출기념탑>이나 <학생운동 기념탑> 같이 너무나 거창하여 자연 경관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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