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도 쉬고 있는 식영정(息影亭)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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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에 다시 식영정을 찾았다. 전남대학교 천득염 교수가 주관하는 ‘소쇄원 알기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두 달 만에 다시 담양에 온 것이다. 식영정의 가을은 정말 정겹다. 지난 여름에 뜨거운 땡볕에서 땀 흘리며 구경하였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식영정 입구에 도착하여 안내판을 먼저 보았다. 그런데 안내판이 새로 단장되어 있어 보기가 좋다.
식영정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75-1
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
김성원은 이 정자 옆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는 또 다른 정각을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 하였다.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나이가 많으나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였다. 이 정자에서 정철,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면서 동운 28수를 지었으며, 송강의 성산별곡도 이 정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주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송강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나는 돌계단을 올라서 식영정(息影亭)으로 간다. 계단을 오르면서 계단 수를 세었다. 어느 책에서 ‘식영정 올라가는 돌계단이 108계단’이라는 글을 보아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계단은 108개가 넘은 111개였다. 올라가는 계단 주변에는 소나무가 울창하다. 문화재청장 유홍준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상좌의 <송화보월도>에 나오는 멋쟁이 소나무도 있고, 낙랑장송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오백년도 넘어 보이는 듬직한 소나무도 있다. 식영정은 언덕 한 끝에 있다. 식영정 정면에서 주변을 둘러본다. 앞에는 소나무 사이로 광주호가 보이고 창계천 물이 광주호로 흐르고 있다. 정면 왼쪽은 무등산이 보이고 오른쪽은 광주호이다. 식영정 뒤는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이고 커다란 성산별곡 비가 있다. 원래 정자는 앞이 툭 트이고 뒤에 산이 있는 곳에 짓는 것이 제격이라는 데 식영정은 바로 그런 곳에 위치하여 있다.
식영정은 명종15년(1560)에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인 석천 임억령(1496-1568)을 위하여 지었다 한다. (담양군 홈페이지의 식영정 소개 글은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행장(行狀)을 보면「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하당과 식영정이 1560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석천 임억령.
그는 호남의 사종(詞宗:시문에 뛰어난 대가)으로 불리는데 해남 석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오형제였는데 령은 문중의 항렬이고, 가운데 자는 천, 만 억, 백, 구를 얹어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으로 이름을 지어 받았다. 셋째인 그는 14세 때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조선 사림의 정통인 눌재 박상(1474-1530)의 제자가 된다. 광산 출신인 박상은 길재-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잇는 청백리이다. 석천은 21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30살인 1525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1545년)때 그는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임백령이 윤원형 일파가 되어 윤임등 대윤의 선비와 사림들을 추방하는 횡포 등을 보고 자책감을 느껴 벼슬을 사퇴하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임백령은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 (2001. 2월-2002.7월 방영)에서 기생 옥매향을 사이에 두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사랑싸움을 벌인 사람이다. 야사에 의하면 임백령은 윤임이 그의 정인(情人) 옥매향을 소실로 삼은 것에 울분을 느껴 을사사화 때 윤임에게 복수를 했다 한다. 임억령은 동생 임백령이 을사사화 직후에 은전을 제안하였으나 사양을 하고 형제간의 절의도 끊은 지조 있는 선비였다.
한편 그는 명종 때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 강원도 관찰사, 담양부사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가 담양부사를 한 것은 그의 나이 62살인 1557년이다. 석천은 담양부사를 한지 3년이 되는 해인 1560년에 사직을 하고 이 곳 식영정에서 자연을 벗 삼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이후 그는 고향 해남에 내려가서 72세로 그의 생을 마친다.) 이때 식영정을 다닌 인물로는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옹 양산보,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등이었고, 호남가단의 한 맥인 식영정 가단을 형성하였다. 특히 석천과 서하당, 송강, 제봉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고 불렀다. (이 ‘식영정 사선’의 시문을 강조하는 뜻에서 식영정은 사선정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한편 제봉 고경명(1533-1592)은 광주 출신으로서 26세인 명종13년 (1558)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사헌부지평, 순창군수, 승문원 판교 등을 거쳐 59세로 동래부사직에서 물러날 때 까지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의병장으로 나서 금산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 광주광역시 남구에 있는 포충사이다.)
식영정 앞에 서니 송강 정철과 고봉 기대승, 면앙정 송순이 지은 식영정 시가 생각난다.
먼저 송강 정철의 시이다.
식영정 운에 차운하다
숨어사는 사람(幽人)이 세상을 피하여
산정에 외로운 정자를 세웠구나.
아침엔 주역을 보아 진퇴를 정하고
저녁엔 별을 보아 갠 날과 흐린 날을 아네.
이끼 무늬는 해 묵은 벽을 오르고
솔방울은 빈 뜰에 떨어지네.
이웃에 거문고 가진 객이 있어
때때로 대사립을 두들기나니.
次息影亭韻
幽人如避世 山頂起孤亭
進退朝看易 陰晴夜見星
苔紋上古壁 松子落空庭
隣有携琴客 時時叩竹扃
이 시에서 숨어사는 사람(幽人)은 서하당 김성원이다. 서하당은 산정에 외로운 정자를 세웠다. 그는 주역과 별점에 일가견이 있고 가끔 거문고도 탄다. 빈뜰에는 솔방울이 떨어진다.
다음은 고봉 기대승(1527-1572)의 시이다.
식영정 시에 차운하다
내 친구 김강숙이
소나무 사이에 초가 정자를 지어
마을 이름을 지금 돌이라 하는데
산 이름은 예부터 별이라고 들었네.
수레에 멍에 매어 좋은 경치 찾거나
흉금을 열고서 정원을 거닐었지.
봄바람이 불어 서로 약속할 만한데
울긋불긋 꽃 그림자가 숲속 문에 비치네.
次息影亭韻
吾友金剛叔 松間作草亭
里名今道石 山號舊聞星
命駕思探勝 開襟佇步庭
春風可相約 紅葉映林扃
( 허경진이 옮긴 <고봉 기대승 시선> P143에서 인용함)
면앙정 송순(1493-1582)의 시도 같이 감상하자
차김상사 성원 식영정운 2수
남쪽에는 승지가 정말 많구나.
가는 곳 마다 경치 좋은 정자로다
내 한가히 지내는 마을은 기촌이고
그대 사는 산은 바로 별뫼일세.
친소는 있어도 세분(世分)이 같아
한 가정처럼 왕래한다네.
말 타고 부담 없이 올 테이니
사립문 아예 닫지 마시게.
次金上舍成遠息影亭韻 2首
維南多勝地 隨處有林亭
我臥村爲企 君居山是星
親疎同世分 來往一家庭
匹馬尋常到 松關愼勿扃
식영정, 환벽당이
이제는 노형의 정자가 되었구나.
시내와 산은 비단같이 곱기도 하고
제택들은 별처럼 늘어서 있네.
본시 풍월도 함께 하며
모두가 한 식구로 지낸다네.
다만 안타까운 건 소쇄원 양산보님이
시든 풀 속에 구름 닫고 누워 있음이라.
息影與環碧 今僞魯衛亭
溪山明似錦 第宅列如星
自可同風月 元非異戶庭
只憐瀟灑老 衰草沒雲扃
한편 송순은 이 식영정 시를 지으면서 시의 앞 부분에 “때는 계해년(1563년) 가을에 주인 김군이 임석천을 위하여 새로 이 정자를 지어주니 석천이 식영이라 이름 붙였다.”, 뒤 부분에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이 일동의 삼승(三勝)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때에 소쇄옹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구에 그를 기리는 글을 적는다.” 라고 자그마한 글씨로 적어 놓았다.
( 담양문화원이 발간한 <국역 면앙집> 상 P226에서 인용함)
그런데 이 송강과 고봉, 면앙정의 5언8구 식영정 시는 운이 똑같이 ‘ 정 亭, 성 星, 정 庭, 경 扃’이다. 이들이 이 시를 한 날에 같이 만나서 쓴 것인지, 어느 분이 먼저 쓰고 난 다음에 나머지 다른 사람이 그 운에 차운하여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 사람의 시가 운이 같은 것 만으로도 송강과 고봉, 면앙정이 식영정 가단으로 같이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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