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사는 김윤제의 삶을 부러워하면서
한편 김인후는 사촌 김윤제의 삶을 당나라의 시인 한유(768-824)나 진나라의 은일시인 도연명(365-427)의 삶에 비유하고 있다. 하서는 또 다른 시에서 ‘쑥과 띠로 지붕가려 한퇴치(퇴치는 한유의 자)의 집이런가. 솔과 국화 아직도 남아 도연명의 밭이로세(松菊猶存陶令田).’ 라고 하여 환벽당의 모습과 주변을 한유의 집과 도연명의 밭에 비유하고 있다. 특히 송국유존(松菊猶存)은 은일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의 한 구절로서(三徑就荒 松菊猶存 :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은 온통 잡초에 덮이어 황폐하였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시들지 않고 남아 있네), 이 구절은 국화 시를 쓸 때 문인들이 많이 인용하는 시구이다. 더구나 국화는 은일의 상징이다. 송나라 성리학자인 주돈이(1017-1073)는 ‘국화는 은자의 꽃, 모란은 부귀의 꽃, 연은 군자의 꽃’ 이라 하면서 연꽃 사랑을 그의 <애련설>에서 쓰고 있다.
고전문학에 있어서 강호가도의 선구자이며 <면앙정가>를 지은 자로 잘 알려진 면앙 송순(1493-1582)도 환벽당에 대한 시를 쓴다.
소나무 아래는 맑은 못, 바위 위에는 정자
정말 맑은 정경이 펼쳐지는 곳 여기가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네
날보고 온 원숭이와 학들이 나를 놀리고 있네.
어찌 속된 꿈을 아직 깨지 못하느냐고.
송순은 환벽당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표현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 속에서 사는 김윤제의 삶을 은근히 부러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원숭이와 학이 송순 자신의 삶을 놀려대고 있다고 느낀다. 속세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서였을까.
또한 송강과 잦은 교류가 있던 삼당시인 옥봉 백광훈(1537-1592)도 환벽당에서 시를 쓴다. (백광훈은 최경창, 정철과 함께 양응정에게 동문수학 한 사이이다. 양응정은 화순에서 사사된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학포 양팽손의 셋째 아들이다.)
서너 구비 안개 낀 골 너무 맑아 빈 듯한데
작은 정자 한가한 꿈 부들자리 바람 불자
잠 깨어나 문을 여니 아무도 뵈지 않고
저녁 햇살 뉘엿뉘엿 물속에 어리누나.
너무 고요한 환벽당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자며 꿈을 꾼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오자 깨어나서 혹시 누가 왔나 하여 문을 열어보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저녁 햇살만 뉘엿거리면서 물속에 비쳐 붉게 어른거린다. 옥봉 백광훈도 역시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시를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
물론 송강 정철도 환벽당에 대한 시를 지었다.
한 줄기 나는 샘물은 양 언덕 사이에 떨어지고
여뀌꽃 핀 물굽이엔 연밥 따는 노래하네.
산골 노인이 술에 취해 냇가 바위에 누웠는데
갈매기는 상관 않고 제멋대로 오락가락.
一道飛泉兩岸間 採菱歌起蓼花灣
山翁醉倒溪邊石 不管沙鷗自往還
송강은 이 시에서 사촌 김윤제의 거침없는 취흥과 삶의 한가로움을 그려냈다. 첫 2구는 청각과 시각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시를 경쾌하고 흥겨운 분위기로 만들었다. 한 줄기 폭포는 두 언덕 사이로 떨어지고 연밥 따는 아낙네의 노래는 여뀌꽃 핀 물굽이에서 들려온다. 뒤의 2구는 작가의 취흥과 거리낌 없는 삶을 자유와 한가로움의 상징인 갈매기에 대비하였다. 산에 사는 늙은이는 술이 거나해져 시냇가 너럭바위에 거꾸러져 누워있는데 백사장의 흰 갈매기는 이 늙은이의 행태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제 맘대로 오가며 날고 있다. 자연의 품에 푹 안기는 편안함과 아늑한 경지를 그려내어 삶의 여운을 준다.
사촌 沙村 김윤제를 추모하면서
환벽당에서 술 마시고 거문고 타고 자연에 취하여 살았던 사촌 김윤제는 1572년 정월에 별세한다. 그리고 그는 무등산 아래에 묻힌다. 당시에 송강 정철은 경기도 고양의 신원에서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김윤제의 장례에 참석을 못하였던 것 같다.
그는 <벽간당>이라는 시를 씀으로서 스승 김윤제를 추모하고 있다.
벽간당의 시냇물 졸졸졸 쏟아내는 구슬소리
가을 새벽 베갯머리에서 술 막 깨어 듣자니
사촌옹(沙村翁)이 가신 뒤에 더욱 더 목이 매여
풍수지탄(風樹之嘆) 감회 일어 차마 듣지 못하겠네.
碧澗冷冷瀉玉聲 五更秋枕酒初醒
沙翁去後增嗚咽 風樹興懷不忍聽
송강은 이 시 아래에 “사촌옹의 작은 초가가 쌍계 위쪽 서석의 아래에 있는데 하루는 옹이 손수 초가집 북쪽 벽에 ‘벽간당’이라 썼다. 옹이 세상을 떠나신 후 그 자손이 추모하여 시를 청하므로 슬픔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사고(師古)에게 써 주었다. 사고는 그의 손자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울소리에 목이 메어 차마 듣지 못하는 것은 바로 풍수지탄(風樹之嘆) 이 일기 때문이다. 풍수지탄이란 중국의 ‘한시외전(韓詩外傳)’책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에 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나라로 가는 도중에 어느 길가에서 통곡 소리를 들었다. 공자는 “좀 더 빨리 가보자. 저 앞에 어떤 사람이 통곡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 가서 보니. 고어(皐魚)란 사람이 거친 베옷을 입고 길가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공자가 “당신은 지금 상주(喪主)가 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통곡을 하고 있소?”라고 물었다. 고어는 공자에게 말하기를. “저는 평생 세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첫째는 젊을 때 온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께서 이미 돌아가신 것이요, 둘째는 나이가 들어서 제나라 임금을 섬겼는데 임금이 사치를 좋아하고 충언을 듣지 않아 그에게서 도망친 것이며, 셋째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제하던 친구들과 사귐을 모두 끊은 것입니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를 하고 싶으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습니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 만나볼 수 없는 것이 부모님입니다”라고 했다. 얼마 뒤 그 사람은 그만 마른나무에 기대어 죽고 말았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 일을 잘 기억할지어다.”라고 훈계했다. 이에 공자 제자 가운데서 자기 부모를 모시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이 열세 명이나 되었다 한다.
송강에게 김윤제는 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런데 그가 친아버지를 잃고 경기도 고양에서 시묘살이 중에 또 다시 아버지와 같은 김윤제를 창평에서 잃었으니 살아 계실 때 잘 해 주지 못한 일이 풍수지탄처럼 가슴에 사무쳤으리라.
이 송강 정철의 <벽간당> 시에 차운하여 창평 성산에 살고 있는 서하당 김성원은 다음 시를 쓴다.
지금 자리에서 들리는 여울물 소리 옛날과 같이 그대로인데
취한 넋이 쏠려가자 이 속에서 술을 깨 보니
사촌(沙村) 노인 돌아가시고 없고 송강 마저 멀어진 채
옛날대로 귀 기울여 어이 나만 홀로 듣나?
席上鳴灘是舊聲 醉魂偏向此中醒
沙翁已逝松翁遠 舊耳那堪獨自聽
벽간당에서 앉아 듣는 물소리는 옛날과 다름없는데 술에 취한 몸이
이 정자에 오니 술이 깬다. 정다운 사람은 이제 없다. 스승 사촌 김윤제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송강 정철은 벼슬한다고 한양에 가 있으니 나만 홀로 이 물소리를 듣고 있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없는 세상이 무상하다. 그리고 옛날 그 시절, 그 사람들이 정말 그립다.
개울에서 조대쌍송을 보면서
이제 나는 환벽당 앞뜰에 있는 연못과 나무들을 구경하고 나서 환벽당을 내려 온다. 차가 세워진 도로변에는 <성산별곡> 한 구절이 새겨져 있는 자연석 비가 있다. 나는 그 비의 앞면을 읽어본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성산별곡> 중에서
그리고 뒷면에는 조대에 관한 글이 있다.
조대
이 낚시터는 옆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와 함께 조대쌍송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 아래 창계의 물은 소(沼)를 이루고 여기서 뱃놀이도 하였다 한다. 조선조 명종때에 임억령등 성산의 사선(四仙)은 조대쌍송, 환벽영추, 송담범주등의 시를 짓고 정철이 성산별곡에서 이 승경을 노래함으로서 조대는 더욱 이름이 나게 되었다. 1986.1.5
나는 비에 써 있는 대로 조대쌍송을 찾아본다. 그리고 보니 주변에 오래된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나는 이 비 사이에 있는 두 그루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런 다음에 조대 자리를 찾는다. 바로 아래쪽에 크고 넓적한 반석이 하나 있다. 아! 이곳이 바로 조대이구나. 그러면 용소도 이 근처였으리라. 비온 뒤라서 그런지 물이 많이 불었다. 헤엄을 쳐도 좋을 성 싶다.
조 대와 용소가 있는 자미탄 개울을 보고 있노라니 석천 임억령, 송강 정철이 읊은 <조대쌍송> <환벽영추> 오언절구 한시들이 생각난다.
먼저 조대쌍송에 대한 송강의 시부터 살펴본다.
조대쌍송
낮엔 두 소나무 아래서 시 읊으며
못 밑에 노니는 고기를 보았네.
종일토록 고기는 아니 낚이는데
유독 주인은 세상사를 잊었구나.
日哦二松下 潭底見遊鱗
終夕不登釣 忘機惟主人
같은 제목의 석천 임억령의 시도 같이 감상하자.
빗물에 씻기어 돌에는 때가 없고
서리 맞은 소나무엔 비늘이 끼어 있다.
이 늙은이 뜻대로 한가함을 취할 뿐이니
곧은 낚시 드리우던 강태공이 아닌가.
雨洗石無垢 霜侵松有鱗
此翁唯取適 不是釣周人
송강과 석천의 시를 보면 둘 모두 낚시에는 별 관심이 없고 세상사를 잊고 한가하게 사는 유유자적함을 더 즐기고 있다.
시나 읊고 못 밑에 노니는 고기나 보고 강태공처럼 낚시대 드리우고 세월을 낚고 있다.
다음은 환벽영추(또는 용추)이다. 환벽용추(環碧龍湫)는 환벽당 바로 아래 창계천의 물이 흐르다가 갑자기 깊어진 곳을 용의 소(沼)를 말하는데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어 용추라고 한다.
먼저 송강의 시이다.
아슬한 정자 파란 소를 내려다 보다
올라가니 배위에 오른 듯하군.
신물(神物)이 꼭 있는 것도 아니건 마는
벌벌떨며 밤이면 잠 못 이루네.
危亭俯凝湛 一上似登船
未必有神物 肅然無夜眠
석천의 시도 재미있다.
맑은 늪 모래톱의 잔잔한 물결이
높직이 있는 누각 바라보니 배와 같구나.
밝은 달 아래 긴 피리를 부니
물속의 잠긴 용은 잠을 이룰 수 없다.
澄湫平沙浪 飛閣望如船
明月吹長笛 潛蛟不得眠
송강의 시는 용을 무서워하는 반면에 석천은 오히려 피리를 불어서 용을 잠 못 이루게 한다. 그리고 둘 다 용소에서 바라본 환벽당을 배로 묘사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런 시들을 감상하고 있으니 내가 저절로 시인이 된 느낌이다. 경치에 젖고 시에 젖어 내가
조선의 선비가 된 기분이다. 자. 이제는 식영정과 서하당으로 가자. 성산별곡이 만들어진 성산 자락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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