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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을 찾아서

송강문학 기행 2

 

 

 

푸르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에서

 

  차에서 송강 관련 책을 읽고 나니 어느 덧 광주에 도착한다.

  시간이 벌써 오후 1시. 당일 코스라서 나는 서둘러서 맨 먼저 환벽당으로 간다. 이곳은 송강 정철이 환벽당 주인 김윤제 밑에서 공부를 배운 곳이다.


  환벽당은 광주에서 광주호를 지나 소쇄원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지실마을 입구에서 충효다리를 건너자마자 곧바로 왼편에 있다.  환벽당 위치는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이다. 이 충효교를 사이에 두고 광주와 담양이 경계이다. 환벽당 입구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고 성산별곡의 한 부분이 써진 자연석이 있으며 개울이 흐르고 있다.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개울물이 꽤나 불었다. 나는 여기에서 조그만 사립문을 통과하여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툭 터진 곳이 나오고 거기에 별당 한 채가 있다.


                            <환벽당에서 바라본 개울과 성산(星山)>

 

  별당은 방 한 칸과 마루가 있으며 <환벽당(環碧堂)>이라고 써진 현판이 붙어 있다. 힘이 있는 필체가 인상 깊다고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환벽당 옆에는 살림 집이 또 하나 있고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데 꽤나 넓다. 이곳에서 보니 무등산과 성산이 보이고 바로 앞에 개울이 흐르고 있어 꽤나 풍광이 좋다.


  나는 환벽당 안내판을 자세히 살펴본다.


환벽당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

                         소재지 : 북구 충효동

   조선 명종때 사촌 김윤제(1501년-1572년)가 세운 정자이다. 푸르름을 사방에 둘렀다는 ‘환벽당’이라는 이름은 신잠이 지었다고 한다. 나주목사등을 지낸 김윤제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곳으로 정철이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머무르며 공부하였다는 유래를 간직하고 있다.

   정자안에는 송시열이 쓴 환벽당 글씨와 더불어 임억령, 조자이의 시가 걸려 있다. 가까운 식영정, 소쇄원과 함께 ‘한 마을의 세 명승’이라 일컬어진 문학 활동의 주요 무대로서, 송순, 김인후,  김성원, 정철, 백광훈등의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정자 아래에는 김윤제와 정철의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전설이 서린 조대와 용소가 있다.

 

  환벽당 주인 사촌沙村 김윤제 金允悌 (1501-1572).

  그는 이곳 광주 충효리에서 태어난 이 지역 토박이다. 그의 종손이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충장공 김덕령(1568-1597)이며 광산김씨 문중으로서 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53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전주감영 병마절도사, 부안군수 , 나주목사 등을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데 1545년(명종1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나주목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고 유유자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쓴다. 그의 제자가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이다.


  안내판에 써진 대로 김윤제와 정철의 처음 만남에는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1551년(명종6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별당 아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너무나 꿈이 생생하여 잠에서 깨어 용소로 내려 가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그가 바로 정철이었다. 16세의 정철은 어머니와 함께 순천에서 사는 둘째형 소(沼)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둘째 형은 을사사화로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보자 세상에 염증을 느껴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처가인 순천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너무 더워서 그는 이곳 자미탄(백일홍 꽃 개울)의 용소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중이었다.


  김윤제는 정철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여 보니 너무 똑똑하고 기상이 좋아 앞으로 크게 될 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정철이  순천에 가는 것을 포기시키고 자기 밑에서 공부를 가르친다. 6년간 아버지를 따라 힘든 유배생활을 하였지만 어릴 때 왕족들과 같이 놀던 고귀한 품위가 정철에게서 배어나와 김윤제의 눈에 띠였으리라. 


  정철은 이렇게 김윤제를 만나게 됨으로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정철은 김윤제의 조카인 김성원(1525-1597)과 같이 김윤제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17살에는 김윤제의  손녀인 문화유씨와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처가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도움도 받는다.


  김윤제의 사위인 유강항은 처음에는 정철과 자기 외동딸과의 결혼에 탐탁하지 않았다 한다. 객지에서 온 정철에게 외동딸을 성큼 내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김윤제는 이 결혼을 꼭 성사 시키고 싶었나 보다. 사위가 시큰둥하자 김윤제는 사위에게 절교 선언을 한 것이다. 유강항은 이런 장인의 행동에 너무 당황하여 결국 결혼 승낙을 하였다 한다.  김윤제가 무엇 때문에 정철을 이렇게 잘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정철이 그의 은혜를 너무 많이 입은 것은 틀림없다. 



환벽당과 관련된 한시 漢詩 들을 음미하면서


  한편 무등산 아래에서의  김윤제의 영향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는 재산도 많았다 하며(환벽당과 성산 지곡마을  사이의 개울에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가 금다리라고 소문이 나서 조정에서 감사가 나오기도 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당시에 내노라 하는 사람들과 인척을 맺었다.

  우선에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1503-1557)가 그의 처남이었고, 호남의 사백(詞伯: 시를 잘 짓는 대가) 석천 임억령(1496-1568)은 김성원의 장인이었다. 또한 그의 처남 소쇄처사 양산보와 도학과 절의의 선비 하서 김인후(1510-1560)와는 사돈 간이고, 양산보와 <면앙정가> 가사를 지은 면앙정 송순(1493-1582)과는 이종간이어서 김윤제는 이들과 같이 잘 어울렸다 한다.


  따라서 김윤제가 지은 환벽당은 송순, 김인후, 양산보, 임억령등 호남 가단 1세대들이 서로 어울려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타고, 술도 마시며 자연을 벗 삼은 곳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환벽당 마루위로 올라가서 벽에 걸린 편액 두 개를 본다.

  하나는 석천 임억령이 지은 환벽당 한시(漢詩)이고 다른 하나는 조자이가 이곳을 들러서 쓴 글이다. 먼저 석천 임억령의 한시 중 앞부분만을 읽어 본다.

 

환벽당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 지

모래가의 죽여(대나무 가마)소리  울리고 있네.


環碧堂


烟氣兼雲氣   琴聲雜水聲

斜陽乘醉返   沙路竹與鳴


 

  이 시는 자연을 벗 삼아 거문고 타고 술 마시는 노옹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환벽당은 안개와 구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거문고 소리는 물소리와 겹쳐서 나고, 술을 마시다 취객은 다시 돌아가고 모랫길에서 대나무로 만든 가마소리만 들린다. 취객은 시를 쓴 석천 자신이다. 아마 석천은 500미터도 안 떨어진 식영정으로 돌아갔으리라. 이 시에는 사촌 김윤제과 석천 임억령이 하루 종일 같이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즐겼던 모습이 절로 보인다. 

 

  사촌 김윤제의  환벽당  안내판에서 본 것처럼  김인후, 송순, 백광훈, 정철등 당대의 최고 문인들은 환벽당을 주제로 하여 시를 썼다.  


  먼저 학문과 문장과 절의로 이름난 하서 김인후(1510-1560)가 쓴 시부터 감상하자.


시내 다리 뜬 달빛을 환히 받고서

물가 따라 노닐면서 읊고 가나니

이 솔 저 솔 작은 산록 의지했는데

너럭바윈 물속에 들어가 있네.

마름 있어 물고기의 낙을 알겠고

논에는 벼가 익어 가득 찼구나.

기묘한 꽃 취한 눈을 환히 밝히니

나그네 말 방주 곁에 세우고 보네.


  이 시의 제목 아래에 하서는 “환벽당은 광주의 동쪽에 있다.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그 위에다 당을 지었는데 깊은 소를 굽어보고 있다. 당(堂)의 주인은 김윤제로 자는 공노이고 호는 사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는 환벽당 주변의 풍요롭고 운치 있는 모습 속에서 취흥에 젖으면서 쓴 시이다. 여기에는 개울가도 나오고 소나무, 물고기와 익은 벼가 눈에 보여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다. 시중유화(詩中有畵)이다.(이 시중유화란 말은 중국 송나라의 소동파가 남종 문인화의 시조이며 당나라 시인인 왕유(699-759)의 작품에 대하여 한 말이다.)

 

                                      <환벽당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