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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을 찾아서

송강문학기행 -담양군 홈페이지에 연재

 

 

 

   송강문학기행을 담양군 홈페이지에 매주 화요일 주1회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11.7에 첫번째 연재 글입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담양군 홈페이지에서 송강문학기행이라고 오른쪽 맨 위에 있는 배너를

 

   누르십시요. 

 

   남도의 향기가 나는 담양에서 조선 선비들의 삶과  풍류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11.21  김세곤 올림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를 세 사람을  말하라면 정철과 윤선도, 박인로이고, 두 사람을 얘기하라면 정철과 윤선도이며, 단 한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송강 정철이다.
 
  정철은 우리나라 말의 조형성을 가장 아름답고 감칠맛 나게 표현한 시인이다. 그의 가사는 대중들에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 왔다. 그중에서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과 <지봉유설>의 이수광, <순오지>의 저자 홍만종등은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가장 극찬하였다. 

  이 임 그리는 노래가 만들어진 곳이 남도 땅 담양 창평이다.
  이제 나는  가사문학의 본향인 담양으로 길을 떠난다.
  이 여정은 상당히 긴 여정이 될 것이다. 기행은 하루 만에 끝날 수도 있으나,  이번에는 송강 정철의 문학 혼을 찬찬히 느끼도록 한 보름 이상을 잡고 문학기행을 한다.  (필자 주)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소재한 한국가사문학관>

 

  길을 떠난다.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3)의 흔적을 찾아서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바 있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성산별곡이 만들어진 누정문학의 본향 담양 창평이다.
 
  7월 중순의 토요일 이른 아침에 광주로 가는 버스는  주5일제가 되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다. 차에 승객이 가득하다.  

  차에서  강릉대학교  박영주 교수가 쓴 <고집불통 송강평전>책을 읽는다. 그리고 송강과 창평과의 인연에 대하여 생각한다.
 
 
  송강 정철.
 
  1536년에 서울에서 태어나서 좌의정까지 벼슬을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 겨울에 강화도에서 58세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정치가, 문인, 풍류객. 
 
  그가 남도 땅 창평과 인연을 맺는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이다.

 그는 서울 장의동(지금의 청운동)에서 4남3녀 중 가장 막내로 태어났다. 청와대 근처의 청운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변에 보면 ‘정철 선생 나신 곳. 이 언저리 장의동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선생이 태어난 곳’ 이라고 써진 표석이 하나 있다. 1988년 12월에 한국관광공사가 설치한 것이다.
 
  그는 10살 때 까지는 제법 호사스럽게 살았다. 아버지 정유침의  벼슬은 별로였지만, 큰 누나가 중종 임금 세자(훗날 인종)의 후궁이었고, 셋째 누나가 왕족 계림군의 부인이었기에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문정왕후 윤씨가  난 아들 경원대군(훗날 명종)과도 소꿉동무로서 잘 어울렸다 한다. (명종은 송강보다 두 살 위이다.)
 
  그런데 1545년 7월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에 파란이 일어난다. 명종의 외척인 소윤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척인 대윤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화에 그의 매형 계림군이 연루된다.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은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인종이 죽은 후에 왕위를 계림군에게 넘기려고 했다는 무함을 한다.  물론 아무런 증거도 없었으나 이 소식을 안 계림군이 미리 겁에 질려 도망을 가는 바람에  혐의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는 안변 황룡산 기슭에서 삭발하고 스님으로 숨어 있다가 한 달도 못되어 체포된다. 그리고 능지처참을 당한다. 계림군의 처가인 정철 집안도 그 불똥이 튀어 풍비박산이 난다.  정철의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귀양을 가고 이조정랑이었던 정철의 큰 형은 광양으로 유배를 간다.

  일은 엎친데 겹치는 것인가. 을사사화가 일어난 지  2년 후(1547년)에 다시 양재역벽서사건(소위 정미사화)이 일어난 것이다. 양재역벽서사건은 척신 계열인 부제학 정언각이 봉투에 든 글 한 장을 문정왕후에게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 딸이 남편의 임지를 따라 전라도를 가기에 전송하려고 과천현의 양재역에 갔다가  익명의 벽서를 보았습니다. 이에 봉하여 올립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이 사건 역시 소윤이 꾸민 공작정치였으나,  문정왕후의 외척 윤원형 일파는 이 벽서사건을 이용하여  윤임의 잔당세력과 정적들을 일제히 제거한다. 이 여파로 정철 집안은 또 다시 고난의 길을 가게 되는 데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그의 큰 형은 다시 붙잡혀 와서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가는 도중에 죽는다. 

  이리하여 정철은  1545년 을사사화이후 1551년 아버지의 유배가 풀릴  때 까지 6년간을 공부도 제대로 못 배운 채 유배지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담양은 송강 문학의 고향

  아버지의 유배가 풀리자 16세의 정철과 그의 가족은 조부의 묘가 있는  창평 지실마을로 이사를 온다. 여기에서 송강 정철(그의 호는 송강이며 자는 계함임)은 27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갈 때 까지 11년간을 창평에서 산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임억령, 송순 등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 학문도 배우고 시도 쓰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송강은 벼슬을 하면서  4번이나 낙향하여 창평에서 지낸다.
  처음 낙향은  1575년 그의 나이 40세 때이다. 이 무렵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이 본격화되어 송강은 서인으로서 동인과 대립하였는데  그만 창평으로 낙향을 한다. 그리고 1577년까지 2년간 창평에 머무른다. 
  이때 그는 <성산별곡>을 지었다 한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두번째는 그의 나이 44세 때인 1579년 8월부터 1580년 1월까지 5개월간이다. 송강은 이 낙향 이후 선조로부터 강원도관찰사 벼슬을 제수 받는데  <관동별곡>의 첫 머리에는 이 당시의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어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세번째 낙향은 그의 나이 46세 때. 1581년 6월부터 1581년 12월까지 6개월 간이다. 그런데 그는 낙향 이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9개월간 일한다. 

  네 번째의 낙향은 1585년, 그의 나이 50세 때이다. 그는 대사헌으로 일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임금이 특사한 총마를 타고 출입을 하여 총마어사로 불리기도 하는 등 권세를 누렸으나,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난 후  서인의 중심인물이 된 그는 동인의 논핵을 받아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에 머물렀으나 끝내 1585년 8월에 창평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송강정을 고쳐 짓고 송강정에 주로 머무르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짓고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가사에 나타냈다. 그는 1589년 10월 초까지 4년 동안 창평에 머물면서 정치적으로는 힘들었으나, 문학에 있어서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런데 1589년 10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우의정으로 발탁되고 정여립 사건의 조사책임자가 된다. ) 
 

  한편 나는 송강 정철이 살았다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 지실마을을  <답사여행의 길잡이 5, 전남 >책에서 미리 살펴본다. 지실마을은 창평의 진산인 장원봉의 남쪽 언덕인 성산(한글로 별뫼)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 성산 아래 기슭과  그 아래 창계천(자미탄이라 함)근처에는 이름난 정자와 원림이 많다.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취가정등이  대표적이고, 거기에서 서북쪽으로  20여리 가면 송강정과 면앙정이 있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재  식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