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 비는 내리고 秋夜雨中
바람부는 가을엔 애써 시나 지을 수 밖에
내 마음 알아줄 이, 세상 길에 드물다네
창밖에 내리는 밤비에 젖어
등불 앞, 마음은 만리를 달린다오.
송재소 번역함 - <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않네> 책에서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다른 번역....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세상에 알아 주는 이 없네.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지은이 : 최치원(崔致遠)
형식 : 오언 절구
어조 : 번뇌적, 고뇌적, 서정적
성격 : 번민과 외로움
표현 : 대구법
특징 : 신분적 한계로 좌절을 겪은 화자의 심정이 표현됨, 대구의 구조로 이루어짐,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감정의 형상화
주제 : 가을 비오는 날 밤의 외로움 또는 고국(고향)에 대한 그리움, 뜻을 펴지 못한 지식인의 고뇌
제재 : 가을비가 내리는 밤
출전 : <동문선> 권 19
고음 : 괴로이 시를 읊조림
세로 : 세상 살아가는 길. 처세의 방법
지음(知音) : ①음악의 곡조를 잘 앎. ②새나 짐승의 울음을 가려 잘 알아들음. ③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거문고의 명인 백아가 자기의 소리를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말이다. 유사한 말로 지음인. 평생 동안에 한 명의 지음이라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는 자기의 속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의 의미로 쓰였다.
삼경 : 한 밤중,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자시, 병야
만리심 : 먼 고향을 그리는 마음. 향수, 사향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세상에 알아 주는 이 없네. : 세상을 등지고 고뇌하는 작가의 심정이 드러난 부분으로 힘들게 시를 읊고 있지만 더 힘든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지식과 포부를 펼 수 없게 된 데 대한 좌절감이 토로되어 있다.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 가을이라는 계절과 밤이라는 시간, 비가 오는 날씨는 화자의 고뇌와 어울리는 배경을 이루며, '밤비'는 화자의 고뇌를 자연물을 통해 나타내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배경은 시적 화자의 고뇌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차단되어 버린 처지를 암시하고 있다.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일에 초연할 수 없는 화자의 번민이 드러나 있고, '만리'는 화자와 세상 사이의 심정적 거리를 말하며, 이렇게 거리가 많다는 것은 화자가 세상 일과 인연을 끊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속 마음은 여전히 세상일에 미련을 끊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해와 감상
'추야우중(秋夜雨中)'은 5언 절구(五言絶句)이다. 깊어가는 가을 밤의 비바람 속에서 서정적 자아는 괴롭게 시를 읊는다. 시를 짓는 일도 괴롭지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정적 자아는 밤늦도록 잠 못 들고[전전반측(輾轉反側)], 등잔을 마주했으나 마음은 만리 길을 떠돈다. 이 작품은 '가을 바람/세상', '삼경(三更)/만리(萬里)'의 대구로 짜임새를 잘 갖추어져 있고, 4구는 수구초심(首丘初心)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 ≒수구(首丘). 수구초심이랍니다. 짐승도 죽을 때면 따뜻한 곳을 찾아 눕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이 고향 생각을 해야지.'한수산, 부초'호마의 북풍.호사수구.)
이해와 감상2
이 시는 5언 절구의 한시로, 깊어 가는 가을밤의 비바람 속에서 괴롭게 시를 읊는 시적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 이 시의 제작 시기는 당나라에 유학한 최치원의 귀국 이전 작품이라고도 하고, 또 귀국 후의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는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시 경향과 내용으로 보아 귀국 후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구(結句)의 '만리심(萬里心)'도 만리 타국에 있는 작자의 심경이기보다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서 이 세상과는 이미 멀리 떨어져 있는 작자의 심회를 호소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적 화자에게는 시를 짓는 일도 괴롭지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정적 자아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불 앞에 마음은 만 리 밖을 내닫는다고 읊조리고 있다. '가을 바람(秋風)' 와 '세상(世上)', '삼경(三更)'과 '만리(萬里)'가 대구를 이루어 짜임새가 갖추어져 있으며 시적 화자의 서정이 비가 내리는 가을밤의 서경과 조화를 이루어 시상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만 난세를 만나 마음껏 뜻을 펼치지 못한 것에 대해 고민하였으며, 이 시는 그러한 지식인의 고뇌를 잘 담아낸 작품이다.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때 사람으로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 中山覆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 四山碑銘〉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고전 시가 문학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을 보내며- 고려 시대 정지상 (0) | 2006.10.12 |
---|---|
벡호 임제 시 (0) | 2006.10.12 |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 (0) | 2006.10.11 |
기러기, 낙엽, 달과 바람 (0) | 2006.10.04 |
다산 유적지에서 두보의 시 평을 보다. (0) | 2006.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