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68. 진주성은 왜 함락되었나 - 제2차 진주성싸움의 패인 |
입력시간 : 2012. 04.18. 00:00 |
|
부원군 유성룡 7년전쟁 반성 '징비록' 기록
우산 안방준 '진주서사'에서 김천일 변호
역사는 어떤 역사관에 따라 평가에 달려
진주성은 왜 함락되었나? 1592년 10월의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큰 승리를 하였는데, 1593년 6월 싸움에는 왜 패했나?
그 원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중과부적(衆寡不敵), 고립무원(孤立無援), 단결부족이 그것이다.
첫 번째 패전 원인은 중과부적이다. 왜군은 1차 싸움 때는 2만 명 이었는데 2차 싸움에는 10만 명이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1차 때는 3천800명 2차의 경우는 6천명 정도였다. 이러한 현저한 병력차이는 처음부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고립무원이다. 1차 싸움 때는 진주성 안의 병력뿐만 아니라 성 밖에도 지원군이 많았다. 최경회, 임계영 등 호남의병도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의 요청으로 진주로 달려왔고 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 경상의병장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2차 싸움 때는 진주성 근처까지 온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위세에 눌리어 아예 후퇴했고, 명나라 군사도 관망으로 일관하였다.
용맹스럽다던 경상의병장 곽재우마저 사지에서 부하를 죽일 수 없다고 물러났다. 전투 중에 김천일등이 조선군과 명군에 지원을 요청하였어도 이들은 냉담하였다.
세 번째는 단결부족이다. 창의사 김천일과 진주목사 서예원은 수시 마찰하였고, 여러 부대가 모여 있어 통솔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1차 싸움 때는 진주목사 김시민과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단결하였는데 2차 싸움에는 경상우도 관찰사 김늑은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을 총지휘한 서애 유성룡(1542-1607)도 진주성 함락의 원인은 1차적으로 왜군 병력이 많은 것에 있다 하면서, 우리 쪽 대응에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593년 7월21일자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진주성 싸움의 패전 원인을 보고하다.
풍원부원군 유성룡이 치계하였다.
“진주의 함락이 비록 강대한 적병(賊兵) 때문이기는 하지만 우리 쪽 대응의 잘못도 개탄스럽습니다. 신이 서울에 있을 적에 목사 서예원이 명군 지대 차사원(明軍支待差使員)으로 함창(咸昌, 현 상주시 함창읍)에 와서 있기에 즉시 글을 보내 ‘진주가 곧 왜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성을 지키는 관원이 어찌 멀리 나와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속히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체하고 돌아가지 않다가 적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들은 뒤에 겨우 입성하여 방비 등의 일을 미리 조처하지 못한 것이 잘못의 첫째이고, 또 제장(諸將)들이 객병(客兵)을 거느리고 한 성 안에 많이 모였는데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 각각 제 주장만 고집하여 분란을 면치 못했던 것이 잘못의 둘째이며, 제장들이 당초에 사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히 함안으로 나아가서 진을 치고 있다가 적병이 크게 이르자 낭패하고 도망해 돌아와서 적으로 하여금 승세를 타게 한 것이 잘못의 셋째이며, 정진(鼎津)에 군사를 진열시키고 굳게 지켰다면 적이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오지는 못했을 것인데, 모두 버리고 떠났으므로 적병이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였고 진주가 함락되기 전에 의령·삼가·단성·진해·고성·사천 등지에 적이 구름처럼 모여 원병의 길이 막힌 것이 잘못의 넷째 입니다.
최원·선거이 이하 장수가 거느린 군사가 모두 도피하고서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진주 사람들이 밤낮으로 구원병을 갈망하며 하늘에 호소하고 빌었으나 끝내 한 명의 구원병도 오는 자가 없어 드디어 함몰되었고, 온 성안이 도륙된 참상은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유성룡은 진주성 패전의 내부 요인으로 (1) 진주 목사 서예원의 대응 미흡 (2) 지도력 부재 (3) 조선군의 후퇴 (4) 지원군의 전무를 들고 있다.
한편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파직되어 안동으로 낙향한다. 1604년에 그는 7년간의 전쟁을 반성하면서 다시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려는 의도로 '징비록'을 쓴다. 그런데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진주성 전투의 패인으로 창의사 김천일의 잘못을 상당부분 거론하고 있다. 징비록의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들은 모두가 한양 백성들 중에서 모집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김천일 자신도 전쟁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서도 자기 고집대로 하는 인물이었다. 또 그는 평소부터 서예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의견이 어긋나기 일쑤여서 명령이 통일될 수도 없었다. (중략)북문을 지키던 김천일의 군사는 성이 함락되었다고 지레 짐작하고는 싸움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다.(중략) 이 때 촉석루에 가 있던 김천일과 최경회는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던 끝에 남강에 투신하여 죽고 말았다.
이러한 유성룡의 비판에 대하여 보성출신 우산 안방준(1573∼1654)은 '진주서사'에서 창의사 김천일을 변호한다. 먼저 그는 진주서사가 이항복이 지은 오성일기와 부합됨을 밝힌다.
|
김천일이 진주성에서 죽은 것을 두고 헛되이 사람 목숨을 죽였다 하니 아! 슬프다. (중략) 더구나 공이 진주를 지키지 않아 적의 예봉을 꺾지 못했다면 호남의 50여성이 어육을 당함은 진주성 보다 훨씬 심하였을 것이다. (중략)또 이 싸움에서 왜적은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에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으니 왜적이 호남으로 가지 못하도록 차단한 공은 어찌 당나라의 장순과 허원의 짝이 아니겠는가?
장순과 허원은 당나라 현종 시절 안녹산의 난 때 외부의 지원도 끊긴 상태에서 여러 달 동안 수양성을 홀로 지키다가 순절한 당나라 장수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진주성 싸움 패인에 대한 책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효종 때 다시 작성된 선조수정실록에도 이 논의가 실려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북인 위주로 써진 선조실록을 바로잡기 위한 것인 만큼 임진왜란 기록도 재평가되었다. 1593년 6월1일자 기록을 보자.
김천일 등이 충의만을 가지고도 사중(士衆)을 격려하였던 것인데 황진·이종인·장윤·김준민 등이 모두 군사 중에 으뜸가는 용무(勇武)를 가졌던 관계로 왜적을 꺾어 상당수를 살상하면서 9일이 지나서야 힘이 다하였으니, 전투 방어를 잘못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서예원은 처음부터 성을 버리려고 하였으나 원수(元帥)에게 눌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고, 밖의 장수들도 모두 군문(軍門)의 명을 받고 반드시 패할 땅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때 나가서 피해야 한다는 의논이 갑자기 일어났던 것인데, 김천일이 항언하여 그 의논을 중지시켰다. (중략) 그때에 김천일 등이 아니었더라면 겁많고 미련한 서예원으로서는 필시 하루 이틀도 막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니, 따라서 성안의 사민 남녀 6, 7만 명이 모두 죽게 되고 허다한 식량과 기계가 죄다 적에게 넘겨졌을 것인데,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서예원의 형 서인원은 의논을 좋아하는 것으로 명사가 되었으나 간사스럽고 거슬렸다.
일찍이 김천일을 교묘하게 비방하면서 서예원을 신원하려고 하였던 까닭에 사대부들 사이에 간혹 이론(異論)이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임금 앞에서 폄하하여 ‘김천일의 뜻은 숭상할 만하나, 재주가 졸렬하여 일을 그르쳤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천일이 국사를 그르친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진주의 유민(遺民)들은 김천일과 서로 친한 경우가 아닌데도 그를 숭앙하여 제사까지 지내면서 오래갈수록 더욱 독실하게 하는 데 반해, 서예원에 대해서는 몹시 업신여기면서 심지어는 ‘서예원은 온 집안이 적에게 투항했다’고 하여 한마디도 애석해 하는 말이 없었으니, 인심을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역사적 평가는 한두 가지 기록에만 의존할 일이 아니다. 여러 사료를 두루 살필 일이다. 그래야만 형평감각을 가질 수 있다. 역사는 누가 어떤 역사관에 따라 평가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니까.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성은 호남의병의 중심지 (0) | 2013.06.09 |
---|---|
호남 역사 연구원이라고 칭합니다. 김세곤 올림 (0) | 2013.06.08 |
김세곤 학장, 호남 역사 강의 , 무등일보 인물 동정 (0) | 2012.04.18 |
세상을 품에 안은 전남대인 37, 김세곤 호남뿌리 바로 알리기에 빠진 역사인물기행작가 (0) | 2012.04.02 |
청렴, 전라도 장성이 청렴 고장이 되다. (0) | 2012.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