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박광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장으로 나서다.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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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 김세곤 | |||||||||||||
일 자 | 2012년 01월 1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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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이순신_교서.jpg [676]Kbyte / 다운로드[5]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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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수군 재건의 길을 걷다 경상도 초계의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하고 있던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이 있은 지 이틀 뒤인, 7월18일에 조선수군이 전몰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는 통곡한다. 조금 있다가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한 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이순신이 권율에게 “내가 해안지역으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한 후에 방책을 정하겠습니다.”하였다. 권율은 반가워하였다. 이순신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한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 등 군관 9명과 함께 상황 파악에 나선다. 송대립(宋大立 1550~1597)은 고흥출신으로서 아우 송희립과 함께 이순신을 모신 사람이다. 그는 임진왜란중인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지도만호 智島萬戶로 있던 동생 송희립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그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고흥에 침입하는 적을 무찔렀으나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7월18일에 이순신은 삼가현에 이른다. 19일에는 단성현(산청군 단성면) 동산산성에 올라 정세를 살피고, 20일에는 단성현감을 만나보고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에 이르러 진주목사를 만난다. 21일에는 진주를 떠나 노량에 이르러 칠천량 해전에서 살아남은 부하들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들었고, 22일에는 경상우수사 배설을 만난다. 23일에는 공문을 작성하여 권율이 있는 원수부에 보내고 진주에서 잤다. 이후 진주 근처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의 집에서 계속 머물면서 연해안 답사 계획을 구상한다. 8월3일에 이순신은 손경례 집에서 선조가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받는다. 조선 수군이 경남 거제도 앞 칠천량에서 궤멸된 지 보름여만의 일이다. 여기에서 7월23일에 작성된 선조의 임명장 전문을 읽어 보자. 이 교지는 아산 현충사에 새로 마련된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왕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다 없어졌으니, 이후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한산을 이미 잃어 버렸으니 적들이 무엇을 꺼려하겠는가. 초미의 위급함이 조석으로 닥쳐온 상황에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방책은 흩어져 도망간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배들을 거두어 모아 급히 요해처에 튼튼한 큰 진영을 세우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한참 덤벼들던 적들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위엄과 은혜와 지혜와 재능에 있어서 평소 안팎으로 존경을 받던 이가 아니고는 이런 막중한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 水使로 임명되던 그 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 부터 크게 떨쳐서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 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 謀策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이제 특히 그대를 상복 입은채로 기용하고 또 그대를 백의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 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 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 지어다. 수사 이하 모두 다 그대가 지휘하고 통제하되 만약 일에 임하여 규율을 어기는 자가 있거든 누구든 군법대로 처단하도록 하라. 그대가 나라를 위해 자기 몸을 잊고 기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남은 이미 그대의 능력을 다 시험해 보아서 알고 있는 바이니, 내 어찌 감히 많은 말을 보태겠는가. 아! 저 육항(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 장수)이 국경의 강 언덕 고을을 두 번째 맡아서 변방의 군사 임무를 완수했으며, 저 왕손이 죄인의 몸으로 적을 소탕한 공로를 세웠던 것처럼.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교서를 내리는 것이니 생각하여 잘 알지어다. - 상중에 다시 3도통제사를 임명하는 교서 (起復授 三道統制使 敎書 1597.7.23) 그러면 이순신이 쓴 이 날의 난중일기를 읽어 보자 1597년 8.3 맑다.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와서 임금이 내린 교서, 유서와 유지를 가져왔는데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교서에 절을 한 뒤에 받은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 그리고는 곧 길을 떠나 바로 두치 가는 길로 들어섰다. (후략) 이순신, 전라도 길을 걷다 선조의 임명장을 받은 이순신은 곧장 전라도로 길을 떠난다. 수하에는 같이 떠난 군관 9명과 졸병 6명뿐. 그는 8월3일에 광양 두치에서 석주관을 지나 구례현에 도착하였고 8월4일은 압록강원(지금의 곡성군 죽곡면 압록리)에 이르러 말의 여물을 먹였다. 정오에 곡성읍에 이르니 관아와 여염집들이 텅 비어 있었다. 8월5일에 옥과에 이르니 피난 가는 사람들로 길이 가득 메워졌다. 그들은 울부짓고 곡하면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았다.”고 하였다. 고을에 이르니 정사준과 정사립이 마중 나왔다. 정사준은 순천 사람으로 이순신의 종사관이었다. 그는 한국식 조총인 정철 총통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8월 6일에 옥과에 머물렀다. 송대립등이 적의 움직임을 정탐하고 왔다. 왜군들은 칠천량 해전에서 이긴 이후 전라도를 침공한다. 왜군들은 8월3일에 진주를 함락시키고 곧장 하동으로 그리고 섬진강을 건너 구례로 접어들고 있다. 송대립은 이러한 왜적의 동태를 시시각각 파악하여 이순신에게 동향 보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7일에는 순천으로 향하다가 곡성 강정(지금의 곡성군 석곡면 유향리)에서 자고 8일 새벽에 떠나 부유창 (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을 먹었다. 부유창은 전라병사 이복남이 명령하여 불을 질렀기 때문에 재만 남아 있었다. 다시 길을 떠나 저물 무렵에 순천부에 이르렀는데 스님 혜희 惠熙가 찾아 와서 인사하므로 그에게 승병장 직첩을 주었다. 그날 저녁 순천부에서 자고 9일에는 낙안(순천시 낙안면)에 이른다. 그리고 도망하는 많은 백성들을 보았다. 물어보니 적이 가까이 까지 왔다고 겁을 먹고 흩어진 것이란다. 군에 이르니 관사와 창고의 곡식들이 모두 다 불타버렸다. 오후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쳤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권하였다. 8월9일 저녁에 이순신은 보성 조양창 兆陽倉에 도착한다.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나 다행히 창고 곡식이 봉인된 채 그대로 있어 많은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양창은 지금의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에 있다. 이순신은 군졸 4명을 시켜 조양창을 지키게 하고 김안도의 집에서 잔다. 집 주인은 벌써 피난을 가고 없었다. 이 날 이순신은 순천부사 우치적과 김제군수 고봉상을 만난다. 우치적(禹致績 ?∼1628)은 1592년 6월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경상우수사 원균 밑의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 거제도)였다. 그해 5월초에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함대를 이끌고 합동작전을 하자, 옥포만호 이운룡과 함께 선봉에서 연합함대를 인도한 용장이다. 그는 1596년에 순천부사가 되었다. 8월9일은 이순신이 보성에서 잠을 자는 첫날밤이었다. 보성은 이순신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의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를 하였다. 장인 방진은 이순신에게 무과시험을 볼 것을 권유한 사람이기도 한데, 방진의 무남독녀인 부인 방씨 또한 대단한 여장부이었다. 그녀에 대한 일화는 <이충무공전서>에 적혀 있다. 정경부인 상주방씨는 충무공의 부인이다. 부친의 이름은 진 震인데 벼슬은 보성군수를 지냈다. 그녀는 매우 배포가 큰 여장부 女丈夫이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그녀의 나이 12세때 화적들이 집에 쳐들어왔다. 아버지 보성공이 화살로 도둑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 졌다. 그는 집안사람들에게 화살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둑들이 집안 여종들과 내통하여 화살을 몰래 빼 돌렸으므로 남은 화살이 없었다. 이 때 방씨 부인은 기지를 발휘하였다. 베 짜는 데 쓰는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양 다락에 힘껐 던지었다. 그리고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도둑들은 놀라서 도망쳤다. 명사수 보성공이 화살이 두둑하니 그들 목숨이 온전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8월10일에 이순신은 몸이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의 집에서 머물렀다. 동지 배홍립도 같이 머물렀다. 배홍립은 고부 사람으로서 157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일곱 고을의 수령을 하였고 흥양현감으로 한산도 대첩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순신을 보필한 충실한 부하이었다. 8월11일 아침에 이순신은 거처를 양산원의 집으로 옮기었다. 송희립과 최대성이 찾아왔다. 송희립은 고흥 출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軍官)으로서 영남지역에의 원병 파견을 주장하였고, 이순신이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 한 배에 탔던 사람이다. 그는 이순신이 절명하자 이순신 대신 북을 치며 수군을 지휘하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최대성(崔大晟 1553∼1598)은 보성 출신으로 1585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차례 벼슬을 거쳐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훈련원정의 신분으로 이순신을 따라 한후장(捍後將)이 되어 거제·옥포· 합포 · 웅포 해전 등 남해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그 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의 관군마저도 무너진 상태에서 의병을 결성하기 위해 아들 언립(彦立)·후립(厚立)과 심지어 가노(家奴)까지 총동원하는 비장한 각오로 의병 수천 명을 모아 모의장군(募義將軍)이란 기치(旗幟)를 달고 의병장으로 나섰다. 특히 순천·광양·고흥·보성 등 20여 곳에서 송대립(宋大立) · 전방삭(全方朔)·김덕방(金德邦)·황원복(黃元福) 등과 함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으로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1598년 6월 전라남도 보성의 안치전투 鴈峙戰鬪에서 적을 추적하던 중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는 보성 정충사(旌忠祠)에 제향되었다. 이순신은 8월12일에는 장계 초고를 작성하면서 그대로 머물렀다. 거제 현령, 발포만호가 와서 이순신의 명령을 들었고, 보성군수가 왔다. 13일에 거제현령 안위와 발포만호 소계남이 인사하고 돌아가고 우후 이몽구가 전령을 받고 왔는데 본영의 군기들을 하나도 싣고 오지 않아 곤장 80대를 때려 보냈다. 이윽고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전황 보고를 하였다. 이 날도 이순신은 보성에서 머물렀다. 사진 :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교지- 아산 현충사에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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