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今臣戰船尙有十二
8월14일에 이순신은 아침에 여러 내용을 담은 장계 일곱 통을 봉하여 윤선각을 시켜 보냈다. 저녁에 어사 임몽정을 만나려고 보성군에 당도하였다. 밤에 비가 크게 왔다. 이순신은 숙소를 옮겨 열선루 列仙樓에서 잤다.
열선루는 보성 관아 바로 뒤에 있는 누각이다. 보성군청 바로 뒤에 보성초등학교가 있다. 이 보성초교 뒷길을 올라가면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보성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바로 열선루가 있었던 자리이다.(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805-3번지) 보성관아는 현 보성군청 자리이고, 보성초등학교는 군수 관사와 객관이 있던 자리였다. 그리고 열선루가 바로 보성관아 근처에 있었다. 누각은 보통 관아에서 만드는데 손님 접대를 위하여 활용하기도 한다.
원래 열선루의 이름은 취음정 翠陰亭이었는데 건축 연도는 알수가 없다. 그런데 1486년(성종 17년)에 군수 신경 申經이 중건을 하고 열선루로 이름을 고치었다. 1544년에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자, 판옥선을 만들 것을 상소한 장성의 청백리 지지당 송흠(1459-1547)도 1504년부터 1506년까지 3년간 보성군수를 하였다. 그의 문집 <지지당 유고>에는 송흠이 열선루에서 지은 시가 남아있다. 이 시를 읽으면 그가 얼마나 왜구의 침범에 노심초사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양의 열선루에서 차운함
왜적은 웅천으로 은덕을 아예 저버리고 침노하고 있고
대장은 군사를 뱀나루 가에 주둔시켰네.
노심초사하여 몸소 해석하여 보니
임금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일세.
8월15일에 이순신은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임금의 유지를 받는다. 선전관 박천봉이 가져왔는데 8월7일에 작성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유지를 받들고 이순신은 그 유명한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장계를 쓴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왜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돌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적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다행한 일로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설령 전선수가 적다하나 미약하나마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그러면 8월15일 <난중일기>를 자세히 읽어 보자
8.15 비가 계속 내리다가 늦게 개었다. 밥을 먹은 후 열선루에 나가 앉았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8월7일에 작성된 공문이었다. 영의정(유성룡)은 경기도 지방을 순찰중이라 한다. 곧 받았다는 장계를 작성하였다. 보성의 군기를 점검하여 네 마리 말 위에 갈라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치는 것을 보았으나 마음이 매우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난중일기의 교감본에는 그 날의 일기가 조금 다르게 적혀 있다.
8.15 비가 계속 내리다가 늦게 개었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8월7일에 작성한 것이었다. 곧바로 잘 받았다는 장계를 작성하였다. 과음해서 잠들지 못했다.
선조의 유지를 받아보고 나서 이순신은 시름을 앓았다. 술 취하지 않고서는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이 되라하니 어찌 시름이 없었을까. 배 12척으로 600척이 넘은 왜군과 싸워야 하니 어찌 슬픈 마음이 안 생기랴.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날, 보름달이 떠 오른 밤에 이순신은 술을 많이 마시고 시름을 앓았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이순신이 그 날 한산도가를 읊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비봉출판사)제4권, P262>에는 이순신이 그날 읊었다고 하는 한산도가 閑山島歌 친필 글씨가 소개되어 있고, 1999년에 보성문화원이 주관이 되어 이순신장군과 보성 열선루에 대한 학술발표도 있었다.
그러면 이순신의 친필 한산도가 閑山島歌를 살펴보자.
閑山島歌
寒山島明月夜上戍樓
撫大刀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丁酉仲秋 李舜臣 吟
한산도가 閑山島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한산도명월야 寒山島明月夜
수루에 혼자 올라 큰 칼 불끈 잡고 상수루무대도 上戍樓撫大刀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에선가 심수시하처 深愁時何處
들려오는 피리 소리.이내 시름 더해주네.일성강적경첨수一聲羌笛更添愁
정유 중추 이순신 음
보성 열선루에서 지은 한산도가 閑山島歌 친필 글씨가 있다니 이는 대서특필감이다. 일반적으로 한산도가는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영인, 통영 한산도의 운주당 수루에서 읊은 것이라고 알고 있고, 필자도 그렇게 알고 있다. 한산도를 답사하여 운주당 수루에 걸린 한산도가 閑山島歌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시조가 보성 열선루에서 읊어졌다니.
그러면 한산도 수루에 있는 한산도가를 살펴보자.
한산도가 閑山島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閑山島明月夜上戍樓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撫大刀深愁時
어디에선가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何處一聲羌笛更添愁
이 두 시조를 비교하여 보면 두 시 모두 제목이 한산도가 閑山島歌
이고 본문도 거의 똑 같은데, 본문 첫 글자인 한 글자, 1자가 다른 점이 특이하다. 통영 운주당 수루는 본문 첫 글자 한이 한 閑이고 보성 열선루는 한 寒이다. 하나는 한가한 한이고 다른 하나는 차가운 한이다.
만약 이순신이 보성 열선루에서 지내는 밤에 잠 못 이룰 정도로 마음이 착잡하여 의도적으로 운주당에서 읊었던 한 閑자를 차가운 한 寒으로 바꾸어 읊었다면 정유년 8월15일 난중일기 내용과 딱 들어맞는다.
곰곰이 생각하여 보면, 이순신이 추석 보름날에 예전에 한산도에서 읊었던 한산도가를 다시 보성에서 읊으면서 한가한 마음의 한 閑자를 차가울 한 寒자로 바꾸어 읊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한산도가는 한산도에서 읊었니, 아니 보성에서 읊었느니 논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통영과 보성 두 군데에서 모두 읊었다고 해석하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풀린다.
이순신은 분명히 정유년 추석날 밤에 선조의 유지를 받고 시름을 앓았다. 몹시 술을 마시고 시름에 잠기었다. 단 12척의 배로 어떻게 왜군을 이길 수 있을지에 마음이 차가웠다. 이러니 술 마시지 않고는 잠을 청할 수 없었으리라.
(참고로, 통영 한산도에서 만들어 졌다는 한산도가도 언제 지어진 것이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어 볼 때, 1594년(갑오년) 6월11일과 1595년(을미년)8월15일 기록이 이 시의 분위기와 부합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594년 일기에는 “충청수사가 와서... 달 아래 앉아 얘기할 적에 옥피리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오다.”라는 기록이 있고, 1595년 일기에는 “하루 내내 여러 장수와 같이 술에 취하였다. 이 날 밤 희미한 달빛이 수루를 비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고 적혀 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선조는 통제사 이순신의 수군 폐지 반대 장계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순신이 알아서 처리 하라고 방임한 것이다. 선조는 어차피 없어질 수군이라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이 당시 왜군은 부산 본영에만 배가 600척이었다. 반면에 조선군은 겨우 12척의 배 뿐이었으니, 아무리 천하의 이순신이라도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순신은 8월16일에는 아침에 보성군수와 군관들을 굴암으로 보내어 도망간 관리들을 찾아내게 하였다. 오후에는 활장이 지이, 태귀생 등과 만났고 하루 더 머무른다. 그리고 8월17일에 보성을 떠난다. 따라서 이순신은 8월9일부터 8월17일까지 무려 9일간을 보성에서 머문 것이다.
박광전과 이순신은 만났을까?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죽천 박광전은 이 시기에 어디에 있었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죽천 선생은 정유년 추석 무렵에 보성에 있었을 것이다. 고향 집에 있었다. 문중 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죽천 선생은 말년에 보성읍 용문리 경곡마을 또는 미력면 발용리 가평마을에 살았다 한다.
그렇다면 박광전과 이순신의 만남은 없었을까. 이에 대한 기록이 <난중일기>나 <죽천집>에 없으니 두 사람이 만났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순신은 보성에서 보성군수를 만났고, 수군 재건을 여러 사람들도 만났으니 이순신이 박광전을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박광전은 이황의 문인이고 동궁의 스승이며 의병장이었으니 이순신도 박광전을 알았으리라. 익히 죽천의 명성을 들었으리라.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요, 이황의 제자인 영의정 유성룡의 친한 친구이니 죽천도 알았으리라. 그리;고 죽천 박광전도 여해 이순신을 만나고 싶어 했으리라.
다만 아쉬운 점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역사 기록이 없는 점이다. 그냥 만났다고 추측할 따름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만남은 그저 소설로 쓸 수밖에 없다.
이순신, 회령포에서 전선 12척을 인수하다.
이순신은 8월17일 새벽에 보성을 떠나 장흥 회령포로 간다. 8월18일에는 회령포에서 하룻밤을 잔다. 8월19일에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선조 임금의 교서, 즉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에 숙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선 12척을 인수한다. 이 배들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전투 초기 전장에서 도망하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전선들이었다.
마침내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지 한 달, 통제사에 재임명되어 대장정에 나선지 보름만인 8월19일에 장흥 회령포(지금의 장흥군 회진읍)에서 수군재건식을 열었다.
8월19일 회령포구 관청에서 잠을 잔 이순신은 20일에는 해남군 북평면 이진으로 이동한다. 24일에 이순신은 전선을 해남 어란포 앞바다로 이동한다. 그리고 8월 29일에는 배를 진도 벽파진으로 옮긴다. 벽파진은 진도 동쪽 끝에 위치하여 해남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며 남해에서 서해로 빠져 나가는 유일한 물목인 울돌목 즉 명량이라는 해협이 있다. 이 해협을 지나면 오른 편 해남 쪽에 전라우수영이다.
이순신은 8월3일부터 시작하여 8월29일까지 거의 한달 동안 전라도에서 수군 재건 길을 걸었다. 경남 진주에서 시작하여 구례∼압록∼곡성∼옥과∼석곡∼순천 부유창∼순천을 거쳐 낙안∼벌교∼보성 조양창∼보성으로 마지막에는 장흥 회령포에 도착하였다.
이 대장정의 숨은 뜻은 무엇일까? 우선에 그는 민심을 파악하고 수습했다. 엄격한 군기를 세웠으며, 마지막 남은 수군 전선 12척을 인수하고 군사를 모았다.
이를 통해 이순신 장군은 한 달 후인 9월16일 해남과 진도 사이에 있는 울돌목에서 마침내 일본 수군과 일전을 벌여 단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무찌르는, 한 순간에 수군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신화를 창조하였다. 이 해전이 바로 명량해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