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박광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장으로 나서다.(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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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 김세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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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 2012년 01월 0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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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산앙정_현판.jpg [975]Kbyte / 다운로드[5]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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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천 박광전, 천봉산으로 피신하다. <죽천집>의 ‘박광전 연보’에는 박광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에 난리를 피하여 천봉산으로 피난을 간 것으로 적혀 있다. 왜적이 또 다시 본도를 침범하자 병든 몸을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선생이 가솔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남원이 이미 함락되어 길이 막혀 통하지 않으니, 우산 안방준과 더불어 천봉산 天鳳山으로 들어갔다. (후략) 천봉산은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에 있는 보성에서 화순 가는 길에 있는 산으로서 이곳에 대원사 사찰이 있다. 박광전은 1559년 그의 나이 34세에 천봉산 대원사에서 벗들과 함께 강학한 바 있고, 남언기로 하여금 우계 遇溪란 두 글자를 크게 쓰게 하여 바위에 새기고 우계기 遇溪記를 지었다. 지금 대원사 입구에는 산앙정 山仰亭 정자가 있고 우계 바위가 있다. 죽천 연보에는 박광전은 우산 안방준과 함께 천봉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안방준의 문집 <은봉전서>에 나오는 안방준의 연보를 살펴본다. 정유년, 1597년 선생 25세 적병을 피하여 대원산 大原山으로 들어갔다. 당시 왜적이 남원을 함락하고 여러 고을에 분포하니, 선생은 늙은 어버이와 죽천 선생을 모시고 대원산으로 들어가 적병을 피하였다. 적병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피난민을 보고 칼을 휘두르며 난입하니 사람들이 모두 도피하였으나, 선생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보다 적 한명이라도 죽이고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수십 명을 이끌고 강가로 내려가 싸웠다. 적장이 유시 流矢에 사살되자, 적이 패주하니 일행이 이에 힘입어 온전하게 되었다. 안방준의 연보에는 천봉산이 대원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우산이 죽천 선생과 함께 피신한 것은 두 연보 모두 일치한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남원이 함락되어 전라도 여러 고을에 왜군이 침범한 때이다. 임진왜란 연표를 확인하여 보니 정유재란 시 남원성 함락은 1597년 8월16일이다. 왜군은 전주를 무혈입성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출하다가, 9월6일 직산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배한다. 이후 왜군은 전라도와 경상도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왜군이 남원성 함락이후 전라도를 다시 침범한 시기는 9월 중순경이 될 것이다. 그러면 정유재란 때 박광전의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1594년부터 1597년 이전까지의 박광전의 행적을 알아보자. 1593년 말에 전주에서 광해군에게 시무책을 건의한 바 있는 박광전은 1595년 봄에 선조 임금으로부터 익위 翊衛 벼슬을 제수 받는다. 익위 翊衛는 조선시대 세자익위사 世子翊衛司의 가장 높은 벼슬로서 정5품 관직이다. 세자익위사에는 좌 · 우 익위 두 명을 두었는데, 이들은 왕세자를 위하여 경서를 가르치고 또한 질문에 응답하는 일을 맡았으며 그 선발이 엄격하였다. 한편 세자익위사는 조선시대에 왕세자를 모시고 호위하는 임무를 맡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로서 계방 桂坊이라고도 하는 데 세자에 대한 강학 講學과 시위 侍衛의 일을 함께 관장하였다. 이때 박광전은 익위 벼슬을 제수 받고자 도성으로 들어갔다. 동궁 광해군은 박광전이 도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궁인을 보내 두 세 차례 위로하였다. 1595년 여름에 그는 신창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신창현 新昌縣은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선장면·도고면 일대에 있었던 고을이다. 그는 회덕현감도 하였으니 충청도와 인연이 상당히 깊다. 얼마 되지 않아 선조는 그에게 또 다시 익위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박광전은 그가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고향으로 귀향하기를 청하였다. 동궁 광해군은 작별하면서 정의 情義를 간곡하게 표하고 <대학연의>와 <소학>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절하고 아뢰기를 “신은 늙어서 곧 죽을 것이니 원컨대 학문을 강론하고 덕을 닦아서 옥성 玉成의 경지를 이루십시오.”하였다. 여기에서 옥성의 경지란 타고난 그릇을 중히 여겨서 성취하게끔 한다는 말이다. 죽천은 고향 보성으로 돌아와서는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우고 <주역>과 <주자서 절요> 읽기를 조금도 그치지 않았다. <주자서 절요>는 퇴계 이황으로부터 받은 책이었다. 1596년의 박광전의 행적은 연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이 해에는 특이한 일 없이 향리에 지낸 것 같다. 1597년 정유년에 왜적이 다시 조선을 침공한다. 72세의 고령 죽천 박광전은 천봉산으로 피난한다. 정유재란이 일어나다 그러면 여기에서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정유재란은 명나라와 일본과의 강화 교섭 결렬로 일어난 일본의 재침략이다. 1596년 9월에 명나라와 일본 간에 4년 여 간에 걸친 강화회담 교섭이 완전히 깨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황제가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명나라 황제의 국서를 보고 분노하여 다시 조선을 침략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1597년 1월에 조선을 재침략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여 되는 1593년 3월부터 일본과 명나라 간에는 평화협상이 시작되었다. 1593년 1월에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2월에는 전라순찰사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군사가 행주산성을 지켜냈다. 행주전투에서 대패하고 서울로 퇴각한 왜군은 다급하여졌다. 마음대로 서울 근교를 돌아다닐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식량도 떨어져서 최악의 경우 고립되어 이도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 도 있었다. 조명연합군이 남하하고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면 서울은 공동묘지가 될 판이었다. 이럴 즈음에 왜군 대장 고니시는 은밀하게 명나라에 강화회담을 요청한다. 명군 총사령관 경략 송응창과 1월 말에 백제관 전투에서 패한 바 있는 제독 이여송도 재빠르게 강화에 임한다. 일본이 명나라를 쳐들어오지 않겠다는 조건만 수락하면 명나라로서도 별로 손해 볼 것이 없는 입장이었다. 1593년 3월부터는 두 나라의 강화교섭은 빠르게 진전된다. 왜군은 고니시가 명나라는 심유경이 나섰다. 먼저 명나라는 일본에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1) 조선에서 완전 철병하고 점령지를 모두 반환 할 것 2) 포로로 잡힌 임해군과 순화군 등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들을 석방할 것 3)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 그리고 명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는 명나라 정벌을 꿈꾸는 도요토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실제 전쟁터에 나와 있는 일본과 명나라의 장수들은 모두 본국을 속여서라도 협상을 타결 짓기로 하고 협상을 계속 하였다. 4월에 서울 용산에서 1차 회담이 되었다. 이 회담에서 왜장 고니시는 왜군이 한양에서 자진 철수 하겠으니 왜군이 피해 없이 철수할 수 있도록 보장하여 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한다.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고니시의 요구를 수락한다. 마침내, 왜장 고니시는 4월18일 용산의 창고에 쌓아두었던 곡식 2만석을 명군에게 넘겨주고 서울에서 철수한다. 명군은 조선군에게 남하하는 왜군에게 어떠한 군사행동도 하지 않도록 조치를 내린다. 남하하는 왜군을 추격하는 조선군의 군사행동 자체를 금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왜군은 단 한명의 사상자도 없이 고스란히 부산에 집결한다. 5월 말경에는 10만 명 정도의 왜군이 부산에 모여들었다. 이는 또 다른 재앙을 잉태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진주성 공격을 준비한 것이다. 왜군은 6월 하순에 진주성을 공격한 것이다. 한편 1593년 5월에 명나라 사신들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도요토미를 만난다. 나고야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은 도요토미는 그들에게 7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이 조건은 1) 명나라 황제의 딸을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2) 일본 무역선의 왕래를 보장할 것 3) 명나라는 일본과 우호관계를 서약할 것 4) 조선 팔도를 분할하여 네 개 도는 일본 영토로 하여 줄 것 5)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보낼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도요토미의 요구조건은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강화의 주역인 고니시와 심유경은 명나라와 일본의 주장이 상대국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양측은 서로 이를 숨기고 있었다. 한편 일본을 다녀 온 심유경은 명나라 황제에게 허위 보고를 한다. 즉 위조된 사죄문을 바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라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는 것이며 그리되면 신하로서 영구히 조공을 바치겠나이다. 이 사죄문이 위조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명나라 조정은 검토 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1596년 6월 명나라의 정사 양방형과 부사 심유경은 ‘일본국왕에 봉한다“는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들어간다. 8월8일 조선도 명나라 사신 수행원 자격으로 황신을 정사로, 박홍장을 부사로 보낸다. 황신은 그동안 명군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서 그들의 실정을 잘 안다는 것이 참작되었고, 박홍장은 무관출신이라 군사정보를 캐낸다는 의도로 임명하였다. 명나라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서 자신이 요구한 강화조건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명나라 사신을 융숭하게 접견한다. 이때가 9월2일이다. 그런데 명나라 사신이 도요토미에게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책봉문만을 전달하자 도요토미는 그가 제시한 강화 7개 요구 조건이 모조리 무시되었음을 알고 분노하였다. 도요토미는 책봉문을 빼앗아 내팽개치며 외쳤다. “내가 임금이 되려면 임금이 되는 것이지. 굳이 명나라 오랑캐의 책봉을 받을 것인가? 또 내가 임금이 되면 명나라 오랑캐들이 어쩔 것인가?” 강화회담은 즉석에서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고니시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또한 명나라와 조선 사신도 죽이려 하였다. 주변에서 만류하여 이들은 죽음은 면하였다.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들은 허둥지둥하면서 일본을 빠져 나왔다. 통역사 요시라는 조선 사신 황신에게 이번에 왜군이 조선을 쳐들어가면 전라도 쪽으로 진격할 것이 틀림없다고 일러주었다. 11.23 부산에 도착한 황신은 곧장 그간의 사정을 아는 대로 보고하였다. 이윽고 명나라 사신도 부산에 돌아왔다. 이리하여 고니시와 심유경간에 벌인 4년여 간의 국제 사기극은 막을 내렸다. 귀국한 명나라의 심유경은 또 거짓말로 명나라에 보고하였으나 명나라는 이번에는 속지 않았다. 1597년에 심유경은 체포되어 엄한 처벌을 받는다. 반면에 고니시도 극형에 처하여 질 뻔 하였으나 도요토미는 조선 재침략의 선봉장으로 그를 다시 기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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