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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죽천 박광전 연재 7, 보성군청 혼페이지, 김세곤 글

제7회 박광전, 보성에서 전라좌의병을 일으키다. (2)
작 성 자 김세곤
일 자 2011년 11월 24일
제7회 박광전, 보성에서 전라좌의병을 일으키다. (2)

한편 임계영, 박광전과 더불어 전라좌의병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장흥의 문위세(文緯世: 1534-1600)이다. 풍암 문위세는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으로 가져온 문익점으로 9대손으로서 박광전의 손아래 처남이고 퇴계 이황과 미암 유희춘의 문인이었다. 그는 어릴 때 외숙부인 귤정 윤구에게서 공부를 배웠는데 동인 계열이었다. 그는 장흥지역에서 세력을 규합하고 자신이 속한 남평 문씨 일문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그리하여 아들 문원개, 문영개, 문형개, 문홍개와 조카인 문희개, 사위 백민수 그리고 종손(從孫) 문익명과 문익화 등과 함께 의병에 참여 하였다. 문씨 가문이 총 출동한 것이다. 문위세는 큰 아들 문원개로 하여금 집안 하인 1백 명을 동원하고 군량을 모으는 한편, 강진 출신 이충량을 자신의 부장으로 삼아 조직을 갖춘 뒤, 보성의 박광전, 임계영의 조직에 합류하였다.

능성현령 김익복(金益福)도 전라좌의병 결성에 중심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는 남원출신으로 일찍이 옥계 노진 밑에서 수학하였고 사계 김장생과 사귀었는데 임진왜란 때 능성현령이었다. 정자 정사제는 보성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그는 상중(喪中)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추천으로 임계영의 종사관이 되었고 군중(軍中)의 기무와 격문을 쓰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박광전의 큰 아들 만포(晩圃) 박근효(朴根孝:1550-1607)는 1591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아버지 박광전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참모관이 되었고, 그의 동생 박근제도 함께 의병에 참여하였다. 눈에 띄는 인물은 박광전의 제자 우산 안방준(安邦俊: 1573-1656)이다. 보성출신인 그는 20세의 나이로 참여하였는데 어려서 죽천 박광전과 매형 난계 박종정에게 공부를 배웠고, 우계 성혼을 찾아가서 공부한 인물로 포은 정몽주와 중봉 조헌을 사모하여, 포은과 중봉을 하나씩 따서 호를 은봉(隱峯)이라 하였다. 그는 양호(兩湖) 도체찰사 송강 정철에게 파견되어 연락참모 역할을 함으로서 조정과도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외에도 전라좌의병으로 참여한 인물은 임계영의 조카 임제, 보성의 염세경, 김홍업, 선경릉, 김언립, 남응길과 장흥의 임영개, 양간, 흥양의 황윤기등이다. 양간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가지 못하고 그 대신 아들 양자하를 보내면서 양곡 100석을 내주었다.

그런데 전라좌의병은 주로 보성, 장흥지역 선비와 의병으로 국한되어 있다. 그것은 이들이 1589년 기축옥사 때 희생을 당한 동인계열인 점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아무튼 7월20일에 결성된 전라좌의병은 나름대로 진영을 갖추고 보성을 출발하여 장흥, 낙안을 거쳐 순천에 이른다. 이 때 마다 임계영은 격문을 돌리어 의병이 늘어났다. 순천에서는 전 만호 장윤(張潤)이 합류하였다. 장윤은 순천 사람으로서 158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제수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창의하여 장사 3백명과 함께 순천부를 수성하고 있었는데 임계영은 장윤을 부장으로 삼았다.

이후 전라좌의병은 8월 9일에 구례를 지나서 남원에 들어간다. 이 때 군사는 수 천 명에 이르렀다. 남원에서 임계영의 전라좌의병은 최경회의 전라우의병과 합세한다. 그리고 장수(長水)를 근거지로 하여 전라도를 위협하던 금산, 무주의 왜적과 싸운다. 이 싸움에는 박광전의 큰 아들 박근효의 활약이 컸다. 그는 갑옷을 입고 왜적을 무찌르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사실이 나중에 보고되어 박근효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장수현감(長水縣監)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전라좌우의병의 합동 작전으로 왜군은 감히 전라도를 쳐들어 올 수 없었다.

9월22일에 임계영과 최경회가 이끄는 전라좌우의병은 무주(茂朱)로부터 남원에 와서 진을 친다. 전라우의병은 남원 객사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전라좌의병은 광한루(廣寒樓)에 머물렀다.

한편 9월 하순에는 김해ㆍ부산의 왜적이 합세하여 진주 방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25일에는 왜군은 이미 창원의 병영 등지에 침입하였고
왜군은 바야흐로 3만명의 군사로 진주(晉州)ㆍ의령(宜寧)ㆍ산음(山陰) 등지를 쳐들어오고 있는데 만약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진주와 인접한 광양, 순천, 구례 등의 전라도도 안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세가 이렇게 위급하고 절박하니 경상도에서는 남원 근처의 군병은 산음 등지로, 순천 등지의 관군은 진주로 지원을 가고, 남원에 주둔하고 있는 전라도 좌우의병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음ㆍ의령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싸움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1592년 10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런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부산 등지의 적이 군사를 합쳐 진주를 포위하다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적이 군사를 합쳐 대대적으로 진주를 포위했다. 당초에 적이 유숭인(柳崇仁)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여러 고을을 분탕질한 뒤 진주로 향하려 했다. 이에 김성일이 호남에 구원을 청하자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이 달려 왔다. 적이 진주에 육박했을 때 유숭인이 말을 달려 성 아래에 이르러 들어가려고 했는데, 김시민이 장수의 명령 계통이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해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성문을 계엄 중에 열고 닫을 때 창졸간에 변이 있게 될까 염려되니 주장(主將)은 밖에서 응원해 주면 좋겠다’ 했다. 유숭인이 돌아오다 적을 만나 패해 사천 현감 정득열, 권관 주대청 등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곽재우가 김시민이 유숭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 계책이 성을 온전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 했다.


특히 경상도 산음 본부에 있던 초유사 김성일은 왜군이 진주성을 공략하고 있다는 소식에 잔뜩 긴장을 한다. 그는 진주가 무너지면 전라도도 무너짐을 일찍이 간파 한 바 있다. 그리하여 김성일은 진주목사 김시민에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을 당부하고 곤양군수 이광악, 진주 판관 성수경, 만호 최덕량, 이찬종에게 전령을 보내 철통같은 방어를 지시한다. 그리고 곽재우, 김준민등 경상우도의 의병장들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또한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와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에게도 사람을 보내 진주성이 위급하니 달려와 도와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에는 초유사 김성일이 호남의병에게 지원군을 요청한 기록이 나온다.

10월 2일. 적병이 소촌(召村 진주에 있는 역 이름)에 옮겨 둔을 치다.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이 첨정(僉正) 조종도를 보내 전라 좌우 의병 및 여러 장수에게 구원을 청했더니 우의병장 최경회가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산음, 단성으로 향하다.

10월 6일 경상 우순찰사 김성일이 또 정랑(正郞) 박성을 보내 좌의병에게 응원을 청하니, 임계영이 남원으로부터 함양으로 향하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전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