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국난 중에도 민생안정이 먼저입니다. | ||||||||||||||
![]() | ||||||||||||||
작 성 자 | 김세곤 | |||||||||||||
---|---|---|---|---|---|---|---|---|---|---|---|---|---|---|
일 자 | 2011년 10월 28일 | |||||||||||||
![]() | ||||||||||||||
![]() | ||||||||||||||
![]() | ||||||||||||||
제3회 국난 중에도 민생안정이 먼저입니다. - 죽천 박광전, 광해군에게 시무책을 올리다. (3) 박광전의 상소는 계속 이어진다. 백성이 농사지을 절기는 이미 닥쳤는데도, 혹자는 군대에 들어가 방비하러 멀리 가고 혹자는 군인 되기를 기피하여 도망가고 혹자는 일족(一族)을 피하여 돌아오지 않으니, 전답이 있는 자는 쟁기질 하거나 김을 맬 수가 없고 전답이 없는 자도 소작하기를 원하지 않으니, 이 형편으로는 좋은 전답과 기름진 토양이 장차 모두 다 쑥대밭이 될 것입니다. 왜적이 만약 거세게 짓밟아 버린다면 끝장입니다. 만약 피차(적과 아군)가 서로 버티어 한해가 가고 또 한해가 거듭된다면, 고단하게 버려진 살아남은 백성은 무엇을 먹을 것이며 방어하는 군사들은 무엇으로 군량을 하겠습니까? 백성이 어떻게 백성이 되며 나라가 어떻게 나라가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을 말하자면, 전답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는 것이 비록 스스로 생활하는 방법이나, 농사철을 어기지 않게 하는 것은 실로 왕도(王道)의 시작입니다. 마땅히 별도로 권농사(勸農使)를 두어 유민(流民)을 불러 모으되, 건장한 젊은이로서 군사에 뽑힌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노약자(老弱者)나 부랑자로 먹을 양식이 없는 자들을 위무(慰撫)하고 보호하여 안심하고 농사를 짓도록 하십시오. 관청에서 종자벼를 주어 전답의 다소에 따라 고루 나누어주고 혹은 부잣집에서 모집하여 부족한 이를 보충해 주고, 또 백성들을 포악하게 침탈하는 폐해를 금지하여 밭 갈고 씨 뿌리고 김매는 데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이것이 훗날에 대한 현명한 대책이 될 것입니다. 요즘 군사를 모으는 초군사(招軍使)나 군량을 모으는 모속사(募粟使)는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는 데, 유독 농사를 권장하는 권농사(勸農使)에 대하여는 주장하는 자가 없이 서로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망종(芒種)의 절기가 4월 중순에 있는데 만약 헛되이 40-50일을 보내 버리면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수령 중에 백성의 일에 마음을 쓰는 이가 몇 사람이나 됩니까? 혹은 수군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혹은 육전에 참여하기도 하고 혹은 조정에 심부름하러 출입하기도 하니, 비록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려는 이가 있어도 역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각 읍에서 충실하고 부지런하고 일 잘 보는 한 사람씩을 뽑아 그 일을 맡게 하고, 또 권농사를 두어 돌아다니면서 점검하고 감독하여, 인력이 넉넉하지 못한 자나 종자벼가 부족한 자는 각별히 조처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주면 오늘날 물정에 어두운 듯한 계책이 마침내 후일의 훌륭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아! 왜적이 득실득실하여 날뛰고 국토가 먼지로 혼란한 이때를 당하여 한 가지 계책을 세워 윗분을 구하는데 응하지도 못하고, 단지 인심을 수합(收合人心)하고 권농하여 농사짓는(勸農耕作) 것으로 말씀을 올리니, 사정에 어둡다는 조롱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50리 땅을 지닌 등(縢)나라가 대국인 제 (齊)와 초(楚)의 사이에 끼어 있었기에, 비록 맹자(孟子)의 재주로서도 계책을 낼 수가 없어, “이 계책은 나의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고, 또, “힘껏 착한 일을 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소견은 다만 이와 같은 데 불과하며, 방어하고 공격하는 계책과 군량을 운반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각기 주장할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칠실(漆室)의 걱정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칠실(漆室)의 걱정’이란 중국 노(魯)나라 어느 고을의 미천한 한 처녀가 깜깜한 방(漆室 칠실)안에서 걱정하기를, “우리나라 임금이 늙었고 태자가 아직 어리니 만약 국난이 있으면 임금이나 백성이 모두 욕을 당할 것이니 여자들이 어디로 피할꼬.”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격에 맞지 않게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을 칠실의 걱정이라고 한다. 죽천의 상소는 계속 이어진다. 또 한 가지 아뢰올 말씀이 있으니 번거롭게 하여 죄송합니다. 지난 임진년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전라순찰사의 군사가 용인에서 궤멸되고, 절도사의 군사는 근왕(勤王)하러 멀리 가서, 도내는 텅텅 비어서 지킬 사람이 없었는데, 고경명ㆍ조헌마저 잇달아 패하였습니다. 신(臣)은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ㆍ진사 문위세(文緯世) 등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만약 불행하여 적에게 포로가 된다면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니 기왕 죽을 바에는 차라리 의(義)에 죽자.”하고, 이에 버마재비가 앞발로 수레바퀴에 항거함과 같은 무모한 계책으로 향병(鄕兵)을 일으켰는데, 보성(寶城)이 실로 처음 일어난 땅이요, 장흥ㆍ남원ㆍ옥과ㆍ곡성 등 몇 고을이 서로 함께 호응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진년 6월부터 지금까지 20여 개월 동안에 선비들의 집에는 재물이 이미 바닥이 나서, 현재 있는 재고를 파악하여 보니 겨우 한 달 정도 지탱할 식량만 남았습니다. 군량이 없는 군사는 머지않아 스스로 궤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상부에 보고하고 의병을 움직이기 때문에 저희들 마음대로 스스로 해산할 수 없으니 실로 낭패입니다. 군사와 양식을 익호군(翼虎軍)에 합치는 것이 시의적절 할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좌의병(左義兵)을 계속 지원하는 것은 다섯 고을에 불과하고, 계의병(繼義兵)을 계속 지원하는 것은 한 도가 힘을 합해야 하는데 계의병은 이미 해체되었으니, 보성ㆍ장흥에서 계의병을 계속 지원하는 자를 좌의병에 속하기를 허락하여 보리가 익기 전의 군량을 보충한다면 아마도 스스로 궤멸되는 군사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무군사(撫軍司)에 명하여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여 주십시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여기에서 계의병(繼義兵)은 1593년 6월 하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최경회의 전라우의병이 순절하자, 최경회등 의병들의 의로운 순절을 이어가기 위하여 최경회의 형 최경장이 의병장이 되어 만들어진 의병이다. 이 의병들은 주로 자기의 부형(父兄)이 전사한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복수의병 또는 계의병이라 하였다. 계의병에 관한 1593년 8월 <난중잡록>의 글을 읽어 보자 전라 우도 의병 및 복수병(復讎兵)과 선비들이 남은 군사 수백 명을 수습하여 전 제독(提督) 화순 최경장(崔慶長)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았는데 최경장은 최경회의 형이었다. 계의(繼義)라는 두 글자로써 장표(章標)를 삼았다. 무군사는 임진왜란 때 설치한 세자 광해군의 병영으로서 군사 모집과 군사훈련에 관한 일을 주로 하였다. 박광전을 소를 받아 본 광해군은 소장을 자세히 살피었다. 그리고 전라감사에게 명하기를 “박광전은 나에게 스승이니 특별히 우대하여 음식물을 나누어 주라”하였다. 박광전은 사흘을 더 머물었다. 그리고 하직하고 돌아올 때 광해군은 술을 하사하며 사부 박광전을 전송하였다. 극진한 대접을 한 것이다. |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49회, 권율 행주대첩, 김세곤 글 (0) | 2011.11.23 |
---|---|
죽천 박광전 연재 4, 보성군청 홈페이지, 김세곤 글 (0) | 2011.11.14 |
죽천 박광전 기행 2, 김세곤 글, 보성군청 연재 (0) | 2011.10.26 |
죽천 박광전 기행 1, 김세곤, 보성군청에 연재 (0) | 2011.10.25 |
권율, 행주산성 승리, 김세곤 글 무등일보 연재 47회 (0) | 2011.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