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전라좌의병, 제1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다.
제1차 진주성 싸움은 1592년 10월5일부터 10월 10일까지 6일간 일어났다. 진주목사 김시민과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이 진주성을 지켰다. 성안의 군사는 모두 3천800명이었다. 성 밖에는 경상우도와 전라도 의병들이 지원했다. 진주성을 중심으로 북면에는 심대승, 서북면에는 최경회와 임계영 그리고 김준민, 서면에는 정기룡과 조경형, 남강으로는 하경해, 남면에는 정유경, 이달, 최강, 조응도 부대가 활동했다. 성 밖의 조선 지원군은 대략 4천명 정도였다.
왜군은 가토 미치야스, 나가오카 타다오키, 하세가와 히데카츠, 기무라 시게지 등이 지휘하는 약 2만 명의 군사가 진주성을 공격했다. 어느 기록들은 왜군이 3만 명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면 6일간의 진주성 싸움을 간단히 살펴보자.
10월 5일 (첫째 날)
왜군의 선봉 천 여 명이 바로 진주성 동쪽 말띠고개의 북쪽 산봉우리에 올라 종횡으로 달리면서 위엄을 떨쳤다. 김시민은 명령을 내려 적을 보아도 못 본 체하고 화살 하나도 허비하지 않도록 했다. 또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큰 용이 그려진 깃발을 세우고 여러 채의 장막을 쳤다. 그리고 성안의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병력이 많은 것처럼 했다.
10월6일 (둘째 날)
왜군은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했다. 이른 아침부터 왜적은 부대를 셋으로 나눈 후 대탄(大灘)으로부터 일시에 진격했다. 한 부대는 동문 밖 순천당산에 진을 치고는 성안을 내려다보고, 두 번째 부대는 봉명루(鳳鳴樓) 개경원(開慶院)앞에 진을 쳤고, 세 번째 부대는 앞의 두 부대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고 진을 쳤다. 나머지 병력은 주위의 산에서 이들을 응원했다. 순천당산에 진을 친 총수(銃手) 천 여 명은 성안을 향해 일제히 쏘아댔다. 탄환이 마치 우레 소리와 같고 수 만여 명의 적이 일시에 소리치니 천지가 진동했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사람이 없는 것같이 조용하였고 반응이 없었다.
조선군은 왜군의 공격이 조금 가라앉은 것을 기다려 포를 쏘고 북을 울렸다. 그러자 왜적은 일시 흩어졌다. 그리고 민가의 대문짝 등을 뜯어와 성 밖 백 보쯤 되는 곳에 늘여 세우고 판자 뒤에 엎드려 조총을 쐈다. 왜군은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 날라리를 불면서 곳곳에서 서로 호응하며 크게 소리쳤다. 밥 먹을 무렵에 그 소리는 그쳤으나 총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왜군은 막사 주위에 불을 밤새 피웠다.
조선군도 외곽의 사방에서 횃불을 올렸는데 의령의 의병장 곽재우는 부하 심대승에게 군사 200명을 거느리고 향교 뒷산에 올라가 호각을 불고 횃불을 들게 했다. 고성에서 활약하고 있던 의병장 최강과 이달도 각각 원병을 이끌고 달려와 횃불을 들고 북을 치고 밤새 함성을 질렀다.
10월7일 (셋째 날)
왜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했고 주변의 여염집을 모두 다 불태웠다. 밤에는 왜군은 붙잡은 아이들을 성 주위에 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서울이 함락되고 8도가 무너졌다. 진주성은 새장 속에 들어 있는 조롱새 신세이니 어찌 너희들이 성을 지키겠는가. 빨리 항복해라. 오늘 저녁에 우리 장수 개산(介山)아버지가 오면 너희 세 장수의 목을 당장 깃대 위에 달 것이다.”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성안의 사람들이 격분해서 아이들을 꾸짖으려 했다. 그러자 김시민은 침착하게 대응하라고 하면서 말대꾸를 못하게 했다.
김시민도 악공을 시켜 문루에서 피리를 구슬프게 불도록 했다. 마치 한나라 유방이 초패왕 항우와 마지막 결전을 할 때 밤에 피리를 불어 초나라 군사들에게 고향생각이 나게 해 사기를 꺾었듯이 김시민도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다.
이 날 밤에 달이 지자 왜적은 대나무로 엮은 죽편을 동문 밖에 세우고, 그 안에 판자를 세운 뒤에 흙과 돌로 토성을 만든 후 그 뒤에서 총포를 쏴댔다.
10월 8일 (넷째 날)
왜군은 총공격을 시작했다. 수많은 대나무 사다리를 놓고 성으로 기어올랐다. 3층 높이의 바퀴달린 산대를 만들어 성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조총과 화살을 쐈다. 김시민은 현자총통을 쏘아 3층 비계의 왜적을 명중시키니 왜군이 놀라서 물러났다.
또 왜군은 소나무가지를 쌓아 해자(垓子)를 메우고 죽편을 이용해 성벽을 기어 올라오려 했다. 김시민은 이를 간파하고 화약으로 불을 붙여 모두 불태워버렸다.
조선군은 미리 준비한 진천뢰(震天雷)와 질려포(蒺藜砲 : 고약한 냄새가 나는 풀을 넣어 만든 일종의 독가스탄), 큰 돌멩이로 성에 오르려는 적을 사력을 다해 막아냈다. 또 가마솥을 많이 걸어 놓고 물을 펄펄 끓여서 적의 머리위에 퍼부었다.
김시민은 낮에는 진내(陣內)에 복병해 내다보지 못하게 하고 군졸들에게 엄명해서 헛살 한 개도 못 쏘게 했다.
밤 10시께 고성의 조응도와 진주의 정유경이 군사 500명을 이끌고 각자 횃불을 들고 남강 건너편의 망진산 위에서 호각을 부니, 성안에서도 이에 호응했다. 왜군은 복병을 강변에 보내 진로를 차단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사졸들은 죽기로 싸웠으나 싸움이 오래되어 화살이 떨어졌다. 김시민은 밤에 사람을 보내 성 밖의 김성일에게 이 상황을 보고했다. 김성일은 화살을 지원하고자 했지만 이 일을 수행할 사람을 얻기가 어려웠다. 하경해가 이 일을 자원했다. 그는 깊은 밤에 성을 몰래 타고 올라와 화살 백여 부(部)를 가져왔다. 이를 안 성안의 군사들은 사기가 넘쳤다.
10월 9일 (다섯째 날)
밤낮에 걸쳐 왜군의 총공격이 계속됐다. 왜군 2천 여 명은 새벽에 단성지역에서 분탕질을 계속했다. 일부는 단계현으로 향했는데 김준민에게 격퇴 당하고 말았다. 다른 일부는 살천 방면으로 나갔다가 정기룡에게 쫓겨 저녁에야 회군했다.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와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구원병 2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측면을 공격함으로서 왜군의 공격을 견제했다. 정유경도 망진산에서 사천으로 이동하면서 적을 견제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전라도 의병이 경상도를 지원한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0월 9일에 단계에 이르니 해가 이미 뜨다. 큰 마을 하나가 시내의 동편에 있는데 앞에 대숲이 있다.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므로 머물러 밥을 짓다. 전라우의병장 최경회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 군사와 합세해 진주로 전진하려 하다. 단성의 피란하는 남녀들이 산에 올라서 바라보고는, “전라도 대군이 본 현에 머물러 있고 또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다행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왜군은 총포와 활을 종일토록 쏘았고, 흙을 날라다 급히 산대를 쌓고 그 위에서 철환을 무수히 쏘아댔다. 이에 대응해 조선군은 성안에서 현자총통을 발사해 세 번이나 죽편을 뚫고 또 목판을 뚫어 한 화살이 적을 관통해 즉사시켰다. 이후로 적이 다시는 산대에 오르지 못했다.
저녁에 진주에서 납치당했다가 도망쳐 온 한 아이가 성안으로 들어 왔다. 그 아이는 내일 새벽에 왜군이 총공격을 할 것이라는 첩보를 제공했다.
10월 10일 (여섯째 날, 마지막 날)
드디어 최후 결전의 날이었다. 왜군은 한 밤중인 1시경에 각 막사에 불을 밝히고 짐바리가 싸고 물러나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해 아군의 마음을 느슨하게 했다. 이윽고 왜군은 불을 끄고 몰래 들어 왔다. 2시께 왜군 1만 여명이 새로 쌓은 동문 성벽에 육박해 왔다. 각자 긴 사다리를 가지고 접근했다. 왜군은 3층으로 만든 가면 인형을 사다리로 올려 우리 군사를 속인 연후에 성에 기어올랐고, 말 탄 왜적 천여 명이 뒤따라 돌진했다. 탄환이 비 오듯 쏟아지고 외치는 소리가 뇌성과 같은데, 왜군 적장은 말을 달리면서 칼을 휘둘러 전투를 독려했다.
이 때 목사 김시민은 동문 북장대에서, 판관 성수경은 동문 옹성에서 화살·진천뢰·질려포·큰 돌마름쇠·불붙인 짚·끓는 물 등 모든 화력과 무기를 총동원해 사력을 다해 진주성을 수비했다.
동문 쪽 전투가 한창일 때에 왜군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돌연히 옛 북문을 공격했다. 긴 사다리와 방패를 이용한 일시의 공격에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한 순간 무너졌다. 곧 전 만호 최덕량과 군관 이눌·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흩어졌던 전세를 수습했다.
진주성 안은 노약자, 어린아이, 아낙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돌과 불을 던져 성안의 기와, 돌멩이, 지붕 덮은 짚까지 거의 다 없어졌다.
마침내 새벽 무렵에 적의 공세가 약간 누그러졌다. 이때 숨어 있던 한 왜군이 쏜 총탄이 김시민의 왼쪽 이마를 관통했다. 김시민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김시민이 총알을 맞아 쓰러 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안의 사람들은 동요했다. 이윽고 곤양 군수 이광악이 민심을 수습했다. 그는 김시민 대신 북장대를 지키며 궁수를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쌍견마를 탄 왜장을 사살했다. 맹공을 퍼 부은 왜군은 날이 밝자 공격을 멈추고 비로소 퇴각했다. 왜군은 수많은 전사자를 불로 소각하고 후퇴하였다. 포로와 우마까지 버리고 쓸쓸히 물러났다. 조선군도 더 이상 왜군을 추격하지는 못했다. 김시민이 탄환을 맞고 장수와 군사들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10월5일부터 10월10일까지 6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끝났다. 진주성 1차 싸움은 조선 육군으로서는 육지에서 왜군을 이긴 가장 큰 승리였다. 이 승리는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아래 3천800명의 군, 관, 민이 단결한 결과였다. 그리고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의 면밀한 주도아래 4천 여 명의 경상도와 전라도 의병들이 진주성 외곽 지원을 한 것도 큰 효과를 봤다. 왜군은 김해 쪽으로 후퇴하였다. 따라서 진주를 점령하여 경상도 의병의 활동을 약화시키고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략은 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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