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영정은 영산강 상류 극락강과 선창산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는 중흥파크 맨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고. 정자 들어가는 입구에 풍영정 안내판이 있다.
풍영정 風詠亭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호
소재지 광산구 신창동
조선 중기에 김언거(金彦琚 1503-1584)가 세운 정자이다.
‘풍영 風詠’이라는 이름은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논어>에서 따온 말이다.
김언거의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 漆溪이다. 1531년(중종 26년)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뒤 물러나 이곳에서 여러 문인 ․ 학자들과 어울리며 생활하였다.
정자 안에는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가 쓴 ‘제일호산 第一湖山’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있으며 송순 ․ 이황 ․ 김인후 ․ 기대승 ․ 고경명 ․ 이덕형 등 많은 문인들의 시가 현판에 남아 있다.
먼저 김언거(金彦琚)에 대하여 알아보자. 김언거는 자는 계진(季珍), 호는 풍영(豊咏)이고 1531년(중종 26)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벼슬은 중종과 명종 대에 금산군수(錦山郡守), 사헌부장령, 헌납(獻納), 연안부사(延安府使), 홍문관교리, 승문원판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지은 정자의 이름 ‘풍영 風詠’은 <논어> 선진 편에서 증점이 공자에게 한 말인 ‘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는 노래를 읊조리고 돌아오겠다.” 의 ’바람을 쐬다‘의 풍風과 ’노래를 부르다.‘의 영 詠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면 그 논어의 이야기 전말을 살펴보자.
자로 ․ 증석 ․ 염유 ․ 공서화가 공자를 모시고 앉아 있을 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 보다 나이가 조금 많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의식하지 말고 얘기해 보아라.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만일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로가 불쑥 나서면서 대답하였다. “제후의 나라가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군대의 침략을 당하고 거기에 기근까지 이어진다 하더라도,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린다면 대략 3년 안에 백성들을 용감하게 하고 또한 살아갈 방향을 알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공자께서 미소 지으셨다.
“구(염유)야, 너는 어찌하겠느냐?”
영유가 대답하였다. “ 사방 60-70리 혹은 50-60리의 땅을 제가 다스린다면, 대략 3년 만에 백성들을 풍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예법이나 음악과 같은 것에 관해서는 군자를 기다리겠습니다.”
“적(공서화)아, 너는 어찌하겠느냐?” 공서화가 대답하였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배우고자 합니다. 종묘에서 제사 지내는 일이나 혹은 제후들이 천자를 알현할 때 검은 예복과 예관을 갖추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점(증석)아, 너는 어찌 하겠느냐?” 거문고를 타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뎅그렁하며 거문고를 밀어 놓고 일어서서 대답하였다. “ 세 사람이 이야기 한 것과는 다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또한 각기 자기의 뜻을 말 한 것이다.” 증석이 말하였다. “늦은 봄에 봄옷을 지어 입은 뒤, 어른 5-6명, 어린아이 6-7명과 함께 기수 (기수 沂水는 노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강 이름이다 -필자 주) 에서 목욕하고, 무우(무우 舞雩는 하늘에 비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 필자 주)에서 바람을 쐬고는 노래를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 욕호기 浴乎沂하고, 풍호무우 風乎舞雩하여, 영이귀 詠而歸 호리이다.)”
공자께서 감탄하시며 말씀하셨다. “ 나는 점(증석)과 함께하련다.”
<논어> ‘선진 편’ 제25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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