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의 어릴 적 삶
고봉선생의 어릴 적 삶을 살펴보는 좋은 자료는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난 해 그의 나이 19살 때 쓴 <자경설>이다. 여기에서 11세까지의 일을 살펴보자
태어난 지 1년 만에 조모를 여의었고 7~8세쯤 되어서는 어머니를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를 의지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고생하시면서 길러주셨다. 나는 어려서 질병이 많아 죽으려다 살아났는데, 오늘에 이르러 아득히 그 일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없다. 아, 백성으로서 곤궁하기가 누가 나보다 더하겠는가. 가끔 소싯적 일을 생각해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으나 또한 한두 가지 생각나는 것도 있다.
계사년(7세)에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고, 다음해인 갑오년(8세) 7월에 망극의 비통함을 당하여 이로 인해 학업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다시는 학문을 일삼지 않았다. 대체로 아버지께서도 역시 큰일을 당한 터라 글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을미년(9세)에 《효경(孝經)》을 읽고 글씨도 배우고 또 《소학(小學)》을 외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1536년 10세) 겨울에 작은 누이가 역질(疫疾)로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됨으로 인하여 산사(山寺)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도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꽤 진취의 희망이 있었다. 그해 겨울부터 정유년(11세)가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는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자경설에서>
이 글을 보면 고봉의 어릴 적 생활을 다음 네 가지로 특징지어진다.
첫째 그는 어려서 질병이 많아 죽으려다 살아났다는 것이다. 즉 병약한 것이다. 이 병약은 그에게 계속 따라 다닌 것 같다. 그가 관직을 사양하는 사직서에 보면 힘줄과 맥이 땅기는 아픈 증상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모친과 누이가 죽은 슬픔을 어린 시절에 맞이하게 된다. 모친인 진주강씨가 7살 때 죽고 이어서 10살 때 누이가 역질로 죽은 것이다. 이런 슬픔은 그의 정신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겠다.
( 참고로 고봉 형제간은 5남1녀인데 남자 둘과 누나가 일찍 죽었다. 고봉은 위에 형 대림, 아래로 동생 대절이 있다. 이는 물재공 유허비에 나온다.)
셋째, 그의 글공부는 상당히 늦게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요즘도 공부는 보통 네 살이 되면 배우는 데 일곱 살에 공부를 시작한 것은 상당히 늦은 감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아버지 물재공이 아우 기준이 사화로 죽자 공부를 안 시켰다고 한다. 물재란 호도 해석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라는 뜻이라 한다. 세상이 싫어 고향을 버리고 이곳에 사는 물재공 입장에서는 공부하여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도 하였으리라.
넷째, 고봉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가르침을 받고 공부를 하였고 서당에는 안 다녔다는 것이다. 그의 스승은 바로 아버지라는 점이다. 아버지가 산에 가 있을 때 고봉도 따라가서 공부를 한 것이다.
고봉이 어릴 적에 살았던 용동마을 (금정). 여기에 아버지 문중 집이 있고 유허비가 있다. 그리고 산 밑에 부모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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