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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기대승

고봉 기대승을 만나다.

제1화


고봉 기대승.  그는 누구인가?



고봉 기대승 (1527-1572). 우리는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를 아는가? 우리의 기억 속에 그는 누구라고 각인되어 있는가?


우선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고등학교 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험문제에 나온 다고 하여 외운 사단칠정 四端七情 논쟁이다. 그 중심에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이 있었다.  퇴고(퇴계와 고봉)라고 하는 두 거유(유학의 거두)가 8년간 편지로 논쟁을 하였다.

사단이 무엇이고  칠정이 무엇인가. 이 理가 무엇이고 기 氣가 무엇인지는 너무 어려워서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사단은 측은, 수오, 사양, 시비지심이 동하여 인의예지가 되고, 칠정은 희노애락애오욕의 일곱 가지, 마치 무지개 색깔 외우듯이 사람의 심정을 말한다고 통째로 외웠다. (그런데 요즘은 칠정을 희로애락애구(두려움)욕으로 말하기도 한단다.)


(퇴계와 고봉에 대한 이야기는 최인호가 쓴 유림 6권에서 대충 한번 본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이 소설로 인하여 고봉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금년 들어 나는 그에 대한 문집 <고봉집>을 읽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는 가히 통유 通儒 라고  말하고 싶다. 통유라. 이는 퇴계 이황이 선조 임금에게 그를 소개한 말이다.



퇴계가 벼슬을 사퇴할 적에, 선조 임금이  지금 학문을 한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묻자, 퇴계가 답하기를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도 기대승은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무니, 이 사람은 통유(通儒)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는 그의 나이 31세에 <주자대전>을 독파하여 <주자문록>을 만들었으니 유학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말할 만하다. 퇴계도 고봉의 분석적이고 예리한 통찰력에  탄복하였으니 26살이나 나이 어린 고봉을 학문적 동지로 대하였으니 고봉은 학문으로는 대성한 사람이다.


또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그는 소기묘 小己卯이다. 소기묘라는 말은 그가 정치에 입문하여 5년이 되는 1563년에 받은 칭호이다. 명종비인 심씨 왕후 외삼촌인 이량의 당이 신진사림들을 제거하려 할 때 그는 조광조와 같은 1519년에 사화를 당한 기묘명현으로 간주되었고, 그는 신진 사림의 거두로 지목되었다.  이 일은 명종 임금이 사실의 진상으로 알아 이량의 당이 귀양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기대승은 승승장구 할 수 있었고, 선조 임금 때는 경연에 참여하여 제왕학을 가르쳤다. 그 강의록이 고봉 사후 선조임금의 어명으로 편찬된 <논사록>이다. 정치인들은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고봉을 만나야 하는가?


나는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는 조선 유학 성리학의 꽃을 피운 쌍벽이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논변은 조선 성리학의 지성사, 세계 유학사에 최대의 사건이다.


둘째 그는 호남의 정신적 지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호남의 자존심이었다. 그의 활동시대(1558-1572)에는 호남인물들이 이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앙정계에서 막강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박순, 유희춘, 노수신, 정철, 양응정, 이후백등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셋째, 그는  직언을 서슴치 않은 우리시대의 선비이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강직하고 직선적이어서 수렴이 부족하다, 즉 남의 의견을 듣는 것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할 말은 하고 언로는 열려 있어야 하며 민본이 나라의 근본임을 명쾌하게 주장한 선비였다.

다음의 우암 송시열의 평은 적절하다. ‘고봉은 박학하고 웅변을 갖춘 데다가, 한결같이 다 분명하게 가려내었다. 창을 잡고 방안에 들어간 경우라고 말 할만 하다.’   

 


이제 그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이번 기행은 역사 속에서, 책 속에서 그를 만나고, 답사를 통하여 현장 속에서 다시 그를 만나는 여정이다. 그가 태어난 곳, 그가 살던 곳, 그리고 그가 공부한 귀전암, 그가 후학들을 가르치고자 한 낙암, 그의 묘소와 월봉서원, 그리고 그가 사람들과 만나서 술 마시고 시를 읊고 나라를 걱정하던 여러 곳, 무등산 식영정 소쇄원 면앙정 등등을 두루 답사할 것이다. 이 여정은 상당히 오랜 기간이 될 것이다.     


 

    

 

 

 

 

 

 

 

 

 

 고봉 기대승 묘소. 월봉서원 바로 뒷 산에 있다.  서원 뒤로 올라가면 왼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