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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윤선도와 그의 시대

 

 

 

   윤선도 . 그는  우리들에게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국문학자중 하나로  각인되어 있다. 특히 그는 한국문학을 이끈 특히 시조작가로서 독보적이다. 그의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는 중 고교 국어시간에 누구나 배웠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다시금 곰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시조 75수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우가나 어부사시사 처럼  자연을 벗삼고 유유자적하게 산 사람은 아니다. 조선의 정치와 경재와 사회에 대하여 조정에서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상소를 하고 직언을 한 그런 선비였다. 그러다가  사직과 유배를 반복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다시 정리 할 필요가 있다.  그는 1587년(선조 20)에 태어나서 1671년(현종 12)에 죽었다. 그는   임진왜란(1592)을 어릴 적에 겪었고,  1616년에는 진사 신분으로  병진소를 임금께 올렸다가 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풀려 났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겪고  인조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수모를  목격한다. 그리고  해남과 보길도에서 은거하면서 오우가(1642)와 어부사시사(1651)를 짓는다. 그에게 공부를 배운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자 그는 부름을 받지만  두번의 귀양이  문제가 되어 벼슬을 제대로 못하고 사직과 벼슬을 번갈아 한다. 더구나 이 때는 세상이 온통 청과의 전쟁 준비(북벌론)로 바쁜 시절이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나라는 다시 상복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논쟁을 일으키고 남인인 그는 다시 74세의 나이에

유배를 간다. 그리고  85세에 세상을 뜬다.

 

 이 시절을 정리하여 보면 조선왕조는 인조반정을 분기점으로 후기에 들어섰고, 백성들은 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왜와 청과의  두번의 전란이 국가의 기틀을 무너져 내리게 하였고, 사대부들간의 붕당이 점점 격화된 시절이었다. 어느 학자는 인조반정이후 서인(나중의 노론)은 300년을  집권하였다 한다. 그와중에서 남인은 들러리를 설 정도였다. 그러나 남인인 윤선도는  입지를  넓히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으나  고집스럽게 직언을 함으로서 훗날  그의 주장이 옳았음을 깨닫게 하였다. (그 예가 광해군때 실세 이이첨에 대한 병진소이다. 1차예송 논쟁도 서인이 이겼지만 그가 죽은 후 2차 예송논쟁에서는 남인이 승리한다.)

 

 윤선도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 수록 그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문학적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당시 조선왕조의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그의 논지는  논리가 분명하였으되 반대파들에게 공격을 받기에 충분하도록 너무 과격한 것도 사실이다.

 당시 실세였던 이이첨, 송시열,송준길, 원두표를  직설적으로 공격하였으니 그가 죽지 않고 유배당한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그의 직언은 지금도 용기있는 선비로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다.

 

 

 

 해남 금쇄동의 윤선도의 묘. 신도비 글은  미수 허목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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